오늘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날

친절한 미소 # 행성 -46

by 이청목

그동안 먹고 사느라

핑계처럼 이유를 대며

하지 못했던 여행.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복수라도 하듯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건강을 위해 수술도 했고,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애써왔다.


좋은 작가가 되고 싶어서

책도 많이 읽으려 노력했고

짧은 글이라도 매일 쓰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핑계는 그만하고

나에게 여행이라는 선물을 줘야겠다.


계획을 세운

여행 당일 아침이 되었다.


이상했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묵직했고 기운이 없었다.


컨디션이 정말 "꽝"이었다.

그래도 여행을 망칠 수 없었다.


“오늘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날이다.”


이 말을 주문처럼 몇 번이고 되뇌며

오늘 세운 계획을 하나씩 하기로 했다.


두 군데의 병원을 들른 후

점심을 먹고 차량을 점검한 후에

여행을 떠나는 일정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다니는 대학병원은 항상 차가 많다.

주차만 30분이 걸린다.


겨우 안내를 받고 주차를 하려는데

주차요원이 다시 다가와 말했다.


“비상등 안 켰던 차량이 있어서 그러니까

별관으로 내려가세요.”


말투와 표정은 딱딱하고

친절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한마디에

아침부터 눌러놨던 예민함이 다시 올라왔다.


그때

다시 주문을 외웠다.


“오늘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날이다.”




진료는 잘 끝났다.


수술 부위도 잘 아물었고

“다음 주부터 가벼운 운동은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풀렸다.


그런데 가퇴원 시 결제했던 금액을 취소하고

다시 재결제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오히려 환급을 받는 것이라 지금 꼭 해야 했다.


“어? 카드 거래정지로 나오는데요?”

라는 직원의 말에 다시 심장이 철렁했다.


알고 보니

새로 발급한 카드를 한 번 사용하면서

기존 카드가 자동 정지된 것이었다.


꾹꾹 못 나오게 눌러 놨던 예민함과 짜증이

슬금슬금 머리를 치켜드는 것 같았다.


또 주문을 외웠다.

“오늘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날이다.”


당황했지만 천천히 정리해서 해결했다.


문제는 잘 해결됐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계속 예민한 걸까?

내가 너무 예민한 사람인 건가?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또 주문을 외웠다.

“오늘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날이다.”


두 번째 병원으로 향했다.


5개월째 다니고 있는 척추관절 병원이다.

꼬리뼈에 통증이 있어서 주사를 맞아야 했다.


“신발은 신으신 채로 올라가서 엎드려 주세요.

속옷이 젖을 수 있으니,

바지를 좀 많이 내릴게요.”


나는 바지를 엉덩이 반쯤 내리고

엎드려 있었다.


3분… 4분… 5분…

시간이 지나도 의사 선생님은 오지 않았다.


간호사님이 와서 말했다.

“선생님이 다음 환자 보시는데

조금 늦어지세요.”


바지를 내린 채 기다리는 시간이

민망함에 더 길게 느껴졌다.


“바지를 내린 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환자에 대한 매너가 아닌 것 같은데요”


목구멍 앞까지 말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오늘 하루 버틴 것들이

괜히 무너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


또 한 번 주문을 외웠다.


“오늘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날이다.”


선생님이 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럴 때가 좀 있어요.”


선생님의 그 말에

나는 시위를 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아무 말 안 하길 잘했다.

내가 말하면서 화가 났을 수도 있어!’


마지막으로

차량 정비를 하러 가기 전,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키오스크 화면에서

아메리카노 HOT이 보이지 않았다.


직원분께 말했더니

“옆으로 넘기면 있어요”라고 했다.


옆으로 넘겼는데

내 눈엔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옆으로 넘겨도 없는데요”

직원분은 친절하게도

조용히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아메리카노 HOT이 내 눈에 보였다.


“어? 여기 있네요!”

직원분은 이미 내 옆까지 와 있었다.


해맑게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순간 미안했다.


내가 잘 찾지 못해서

밖으로 나오게 만든 것도 미안했지만,


오늘 있었던 예민함에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한 건 아니었겠지?

라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런데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도와주려 했던

그 친절이,

이상하게 마음을 툭 건드렸다.


오늘 하루 내내

사소한 말투, 작은 실수, 예상치 못한 상황들에

마음을 흔들었지만,


카페 직원 한 번의 미소는

모든 걸 가라앉히고

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표정과 말투가

상처가 될 때도 있었고,

누군가의 친절이 기쁨이 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그 직원의 미소가

오늘 하루도 잘 버텨서 주는 선물 같았다.


여행을 떠가기 전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웠다.


“오늘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날이다.”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