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행복했던 하루 # 행성 -45
나에게 주는 국내 여행의 당일이었다.
행복하고 설렐 줄 알았던 아침은
의외로 컨디션도 안 좋고
하는 일마다 자꾸만 꼬여
짜증이 차오르는 날이었다.
그래도 선물 같은 오늘 하루를
짜증으로 낭비해 버리고 싶진 않았다.
행복한 날이잖아.
나는 즐겁다. 기분이 좋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아침부터 짜증스럽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자동차 정비까지 마쳤으니
진짜 여행만 남아 있었다.
첫 목적지는 대전 유성구였다.
교회에서 알게 된 동생이 사는 곳이다.
차를 몰고 조금 달리자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여행,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창밖을 보니 서서히 해가 넘어가고
하늘엔
울긋불긋한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하늘이라는 바다에
하얀 구름이
잔잔한 파도처럼 흘러오는 듯했다.
이렇게 멋있는 일몰을
사진으로 기록해 놓고 싶었지만
운전을 하는 바람에 눈에만 담아 왔다.
대전에 도착하니 5시 30분이 되었다.
먼저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고
추워진 날씨에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동생은 퇴근 후 숙소 앞으로 온다기에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됐다.
산책을 할 겸 밖으로 나와 있었다.
11월의 밤공기가
오랜만이라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동생은 큰 키로 멀리서부터 팔을 흔들려
나를 맞이해 줬다.
잘 지냈냐는 인사와 함께
맛있는 우거지 감자탕집으로 안내했다.
역시 맛집답게 사람도 많고
주문한 음식도 금세 나왔다.
이야기하느라 사진은 남기지 못했지만
깔끔했던 맛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다음번에 또 대전을 가게 된다면
이곳에서 한 번 더 식사하고 싶다.
그때는 꼭 사진을 남기리라 다짐해 본다.
카페로 이동해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18살이라는 나이가 차이나지만,
이 아이가 20살 때부터 알고 지낸 터라
친동생 같은 아이다.
180Cm가 넘는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
드론연구원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니
미래까지 밝은 청년.
어르신들이 보면
사위를 삼고 싶어 하는 1순위 청년이다.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도
박보검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오해하지 마시길
당연히 박보검이 훨씬 잘생겼음-
그동안 겪어온 삶의 조각들을
동생에게 꺼내놓았다.
동생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18살이라는 나이차이가 무색하게
두 시간 동안이나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카페에서 두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다 얘기할 순 없지만,
우리의 주된 이야깃거리는
"나이가 들어도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였다.
카페를 나와서 운동삼아
충남대 주변을 걸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좋았다.
동생이 사는 자취방 근처에서
따뜻한 포옹과 함께
또 만나자는 기약을 하고 헤어졌다.
듬직한 동생이고
걱정도 됐지만,
왠지 아쉬움이 더 컸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걸었다.
충남대를 지나
사람이 많았던 먹거리 쪽으로 걸었다.
사람이 많은 만남의 장소 같은 곳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서 오늘 있었던 감정을 정리했다.
아침엔 예민한 상황에
사람들이 불편하고 싫었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반가웠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얼마 만에 있는 건가?
가만히 핸드폰을 보면서
주변의 소음에 귀를 기울여봤다.
음악 소리, 고민거리,
사랑하는 사람들의 대화,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화,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의 주정까지.
사람들의 사는 소리를 들으며
30분을 그곳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
나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보였겠지.
그때였다.
“저기요”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반대쪽에서 두툼한 롱패딩을 입고 서 있던
20대 후반쯤 보이는 젊은이였다.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젊은이는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쁜 아가씨 있는데 노래방 안 가세요?”
하하하...
순간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좋았던,
나의 사색을 방해하는
뜻밖의 등장인물이었다.
그런데 웃긴 건,
그 말투가 너무 친절했다.
만약 그 말이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는데
커피 한잔하세요.” 였다면
홀딱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중히 거절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지막에 그 청년의 속삭임과
친절한 말투를 생각하며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오늘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혼자 보내던 일상 속에서
오늘의 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그것만으로 이 여행의 첫날은 충분히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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