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트] 경멸과 조롱의 대상인 '아내'

청순한 여자친구와 무서운 마누라 사이에서

by 배윤민정

안녕하세요,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의 저자 배윤민정입니다.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 작가 노트를 올려보려고 합니다. 이번 책을 쓰는 동안 제가 남긴 일기라든지, 책에 싣지 않은 조각 글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를 사랑해주신 분들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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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 난 죽은 아내를 자주 생각하지만 한 번에 많이는 생각할 수 없다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한 남자가 병으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친구에게 하는 말이다. 소설에서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머릿속에 물음표만 떴다. 또렷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만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종잡을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도 끝내 답을 알 수 없었지만 이때의 알쏭달쏭한 느낌은 기억의 한편에 남아 있었나 보다. D와 이혼 절차를 마치고 과거를 돌아보며 지내는 요즘, 이제 나는 이 말이 얼마나 슬픈 말인지 이해한다.

그렇다. 내가 상실한 것들을 한꺼번에 돌아볼 수 없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떠올리면 가슴이 파열될지도 모르니까. 이 글도 내 앞에 놓인 상실의 자리를 곁눈질하면서 쓰고 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자주, 하지만 한 번에 조금씩, 불쌍한 아버지 스완 씨식으로.”


나의 가슴은 물이 가득 차 있는 물탱크 같다. 분노, 원망, 자책의 조각도 떠다니지만 결국 슬픔이 그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슬픔이 출렁일 때마다 말은 자꾸 끊어지고 문장은 쪼개진다. 분노의 감정은 언어와 잘 맞는 짝이다. 화가 날 때면 화나게 만든 대상의 멱살을 붙잡고 말을 마구 쏟아내고 싶다. 내 분노의 자기장 안에 상대를 끌어들여서 공감을 구하고 싶다. 그러나 슬픔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슬픔의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소리다. ‘아아아’ 하는 비명. 또는 ‘으흐흑’ 하는 울음. 한밤중에 내가 홀로 내는 그런 소리뿐. 이 소리에는 목적도 대상도 없다. 나는 리어 왕처럼 울고 있다. 그와 내가 다른 점은 내 곁엔 위로와 농담을 건네는 광대가 없다는 것.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사람이 너무 슬프면 짐승이 됩니다.”


*

무엇이 가장 슬픈가? 결혼 생활 내내 나는 내 슬픔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이 슬픔의 이유를 정리하는 데 내 에너지를 다 써버린 기분이다. 지금에 와서 ‘남편’이었던 D와 ‘아내’였던 나를 생각하면 양쪽 절벽 끝에 서 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리 사이의 틈은 깊고 멀다. 말을 통해서 이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가? 글을 통해서 이 거리가 좁혀질 수 있는가? 그런 시도는 마치 텅 빈 허공에 징검다리를 놓으려는 것처럼 헛된 일이 아닌가?


최근 인터넷에서 우연히 포스팅을 하나 읽었을 때 다시 한번 이 이미지가 떠올랐다. 2016년 허핑턴포스트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 <모든 남자는 장님이다, 2016. 01. 28.>

https://www.huffingtonpost.kr/sehoi-park/story_b_9094910.html


[우리 부부는 결혼 전 아내가 살던 효창동 투룸에서 1년 동안 동거를 했다. 짐을 가지고 그녀의 집에 들어간 지 3일쯤 되었을 때 아내는 퇴근한 내게 물었다. "뭐 바뀐 거 없어?"라고. 이 질문은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질문이라고 과대 포장되어있지만 우리는 절대 이 질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다만 싫어할 뿐이다. 지나치게 어려운 시험 문제를 싫어하지 무서워하지는 않지 않나? 하여튼, 시황을 살피는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핀다. 오랜 경험상 섣부른 오답은 감점이다. 그러나 뭔가가 보일 리가 없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모든 남자는 장님이다. (나만 장님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남자'라고 믿으면 좀 든든하다.)]


[나는 디퓨저의 향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때? 향 좋지?" 라고 물어보는 아내에게 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좋아'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 내 '좋아'라는 대답 속에는 '나는 이게 어제의 디퓨저와 다른 향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당신이 좋은 향을 샀을 테니 나도 좋다고 믿는다'는 뜻이 포함되어있었다. 결혼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계약이고 믿는다는 건 결국 종교다. '이게 무슨 향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좋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게 결혼한 남자의 결기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는 전부 장가를 간 대학 시절의 동기 5명을 만나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우리 중에 거실에 있는 소품을 세 개 이상 기억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이었다면 새벽 5시까지 이어졌을 술자리는 속전속결로 각 두 병씩 비우고 오후 11시에 파했다. 결혼은 6시간 어치 사람다운 모습으로 친구들을 귀가시켰다. 완성된 남편은 세상에 없다. 모든 여자는 장님인 남자를 데려와 조금씩 보듬어 가며 키워야 한다.]


글쓴이는 집 안의 데코레이션에서 바뀐 부분이 마음에 드냐는 아내의 질문을 ‘지나치게 어려운 시험 문제’라고 칭한다. 그는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지만 아내에 대한 신뢰의 증표로서 ‘좋다’라고 동의를 표하며 그것을 ‘결혼한 남자의 결기’라고 묘사한다. 이 글은 끝끝내 아내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맞춰가는 남편의 감상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은 훈훈한 이야기인가? 이 정도만 돼도 괜찮은 남편인가? 사람들은 이 글을 보며 미소를 지을까? 이 포스팅의 하단엔 <베이비>라는 매체에 기고한 글을 편집해서 올린 것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베이비>의 편집부는 육아잡지의 주구독자인 여성들이 이 글을 읽고 분노하지 않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너무 슬펐다. 아마 D가 이 칼럼의 내용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나는 한참동안 입을 꽉 다물고 있다가 고작해야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사람이야. 너와 같은 사람이야.”

아마 그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이의 아득한 거리이며 내 슬픔의 이유다.


*

결혼하고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남편의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철저하게 타자화되는 일이었다. 결혼 초기에 D가 ‘형’이라고 칭하는 이들과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때가 기억난다.

“A 형은 형수님이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우게 되니까 너무 좋더래. 결혼해서 좋은 점도 있지만 아무래도 자유롭지 못하니까 답답하대.”

나는 D와 함께 밥을 먹다가 숟가락질을 멈추고 물었다.

“남자들끼리 단톡방에 모여서 아내 욕하고 있는 거야?”

“무슨 소리야. 욕 안 했어. 그 형도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야. 단지 그런 감정이 있다는 걸 가볍게 얘기한 것뿐이야.”

“다시는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마.”

D는 ‘형’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다. 나는 내 가슴속을 꽉 채운 부당하다는 감정을 어떻게 말로 얘기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설명하자면 너무 피곤했다.


자, 들어 봐. 한국 사회에서 아내의 지나친 간섭 때문에 자유를 박탈당한 불쌍한 남자는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이야. 결혼 전에는 보호본능을 일으키던 청순한 여자친구가 결혼 후에 무서운 ‘마누라’로 돌변했다는 호소가 너에게도 낯설지 않을 거야. 아내 몰래 게임기나 카메라를 사면서 야단 맞을 까봐 벌벌 떠는 남자의 이야기를 처음 들어보진 않았을 테지. 우리가 결혼 전에 들었던 혼인교리에서도 ‘아내의 크고 격한 목소리를 들으면 남편은 이성마비 상태가 된다’는 말이 있었잖아? 나에게는 이런 말들이 전부 불길한 예언이나 협박처럼 들려.


결혼하고 나면 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편을 간섭하고 구속하는 무엇이 될 거라고.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될 거라고. 지금 너와 ‘형’들이 하는 말은 이렇게 나를 압박하는 문화적 배경에 힘을 더하는 거야. 나는 두려워. 내 손을 잡고 있을 거라고 믿었던 네가 어느새 반대편에 서서 나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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