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경계 시리즈
살아 움직이는 대부분의 생명들은 각자가 처한 환경에 적합한 집을 찾고 짓는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나,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둥지나, 거푸집에 시멘트를 부어 만든 건축물이나 재료와 형태는 달라도 그 본질은 같다. 집 짓기의 본질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 집이라는 경계를 통해 풍수해, 맹수, 인간 등 바깥의 여러 위협을 차단하고, 안에서는 긴장을 풀고 휴식한다.
아마 나의 삶도 외부가 아닌 안전한 내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부와 모가 어떤 계기로 만나 사랑을 하고, 그 과정에서 복잡한 호르몬과 감정과 온기는 굳게 닫혀있던 두 개별 존재로 하여금 서로를 향해 내부를 드러내도록 돕는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경계를 짓고 그렇게 확장된 공간을 새롭게 ‘안’이라 규정하며 확장한다.
집이라는 경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분됨을 의미한다. 오직 허용된 것만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이 제한적 허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은 ‘밖'을 향해 열려있어야 함을 나타낸다. 어떤 것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는 틈 없는 경계는 집이 될 수 없다. ‘안’도 ‘밖’도 무의미해지는 극단적 경계는 ‘살아있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집은 닫힌 구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의 안전한 밸런스를 위해 필요에 따라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유연한 경계라 할 수 있다. 유연한 경계성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장치가 바로 창과 문이다. 창문이라는 제한적 허용을 통해 우리는 안과 밖을 연결한다. 그곳으로 빛이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온다. 여러 냄새와 소리가 들어온다. 그리고 우리 또한 창과 문을 통해 밖과 연결된다.
살아있는 존재의 최소 단위인 세포 또한 세포막이라는 경계로 둘러 쌓여 있다. 세포막은 기본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세포의 내부 구성요소는 70~80%가 물인데, 세포막 덕분에 세포 내부는 외부로 흩어지지 않고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세포막은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빈틈없이 쌓은 장벽처럼 닫힌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세포는 세포막을 통해 적극적으로 외부와 교류한다. 작은 분자들은 마치 그물코를 통과하듯 자연스럽게 안과 밖을 오가고, 크기가 큰 분자들은 회원 전용 출입구처럼 특수한 단백질 통로를 통해 이동한다. 또 어떤 물질은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듯 세포가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해 안팎으로 이동시키기도 한다.
세포막이라는 유연한 경계가 세포라는 독립된 개체를 존재하게 한다. 안과 밖을 구분하고, 또 연결하는 경계가 없었다면 지구상에 생명체는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생명은 내부 물질이 아닌 세포막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주 먼 옛날 원시 세포막이라는 경계가 출현했고, 경계가 안과 밖을 구분하며 생명체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경계는 생명체가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를 유지하고, 진화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우리들의 삶과 세포의 생존방식에는 프렉탈 구조와 같은 자기 유사성이 보인다. 수많은 세포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는 하나의 세포가 그러하듯, 본능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경계를 통한 자기 폐쇄가 아닌, 경계로 인한 안정감을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안과 밖을 연결해 나간다. 약 37조 개 이상의 개별 세포들은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서로 상호작용하며 통합된 하나의 몸으로서 기능하기 위한 집합성을 띄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로서의 몸을 통해 창발된 나-의식, 즉 개체로서의 인식은 또다시 가족 단위의 소규모 집단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 점점 더 큰 규모의 사회를 형성해 나간다. ‘경계’를 통해 하나의 세포 존재는 거대하고 단일한 인간-세계로 확장된다.
연희동에는 유난히 높은 담으로 둘러 쌓인 단독주택들이 많다.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견고한 경계는 제한된 통로를 통해 특정 존재들에게만 안과 밖으로의 이동을 허용한다. 그럼에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의도하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오고 감 또한 빈번히 목격된다. 집집마다 가꾸고 있는 나무들은 담장 보다 높이 자라 경계를 넘나들고, 길고양이들은 오히려 담을 전용 출입구처럼 활용하며 안과 밖을 오고 간다. 하늘은 나는 새들은 차원이 다른 존재다.
건축가 아내 덕분에 최근 연희동 주택 리모델링 현장을 자주 방문할 수 있었다. 모든 장식과, 설치물과 창틀, 심지어 담장마저 제거한 날 것의 현장에 서서 둘러보면,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진 듯 느껴진다. 사방으로 뚫려 있는 구멍, 본래는 창이었을 이 통로를 통해 이웃들이 가꾸는 나무며 잔디며 여러 식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마치 파도처럼 외부의 식생들은 넘실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듯 감각되었다. 물론 실제로 전달되는 것은 대상에 부딪힌 뒤 튕겨 나온 빛의 입자일 테지만, 창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것은 단지 초록뿐만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의 집을, 경계 안의 내부를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이웃의 손길이 각박한 도심 속에 숨 쉴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초록의 생동력이 내부에 움틀 수 있게 허용한 마음들은 유연한 경계를 통해 서로의 경계 안으로 자연스레 스며든다.
전국 곳곳에서 추진되는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대부분 기존의 마을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오랜 시간 쌓인 사람들의 삶과 그 흔적들,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복잡하게 얽힌 경계들을 허물고 네모반듯하게 규격화한 새로운 경계를 쌓아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솟아오른 건축물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장벽처럼 안과 밖을 지나치게 구분하는 역할로서 기능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본래는 여기저기로 열려있었고, 오고 감에 제한이 없었던 골목골목은 사라지고, 감시가 삼엄한 게이트를 설치해 검열을 통과한 대상만을 내부로 허용한다.
동일하다 여겨지는 대상을 향해서만 주어지는 환대, 다름을 거부하는 차별, 자기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극단적 이기주의 모두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굳어진 경계를 통해 강화된다. 경질화된 경계는 다시 내부 또한 건강하게 흐르지 못해 굳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경계 너머의 공동체를 서서히 병들게 한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집은 무엇일지 고민해 본다. 어떤 집을 지어야 할지, 꼭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 세계 안에서 경계 지을 것인지 말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경계가 필요하다. 안과 밖을 구분해 줄 뿐만 아니라 안과 밖의 활발한 교류를 가능하게 해주는 온전한 경계가. 각자의 경계를 통해 고유성을 유지하며 다름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경계밖과 과감히 연결된다. 내가 짓는 집은 새도 고양이도 여러 식물들도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각자의 정원이 유연한 경계를 통해 모두의 정원이 되면 어떨까.
모두의 삶을 시작되게 한 사랑에 성질이 있다면 부드러움에 가까울 것 같다. 부드러운 사랑은 유연한, 허술한 경계 안에서 발현된다. 그리고 부드러운 것은 경계를 넘나 든다. 각자가 지은 공간에 사랑이 피어나기를, 그래서 서로의 공간으로 경계를 넘어 연결되기를, 그렇게 조금 더 온전한 우리가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