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경계 시리즈 - 노자 도덕경 43장
‘경계’는 단단하다. ‘경계’라는 말을 떠올리면 주로 단단하고 변형되기 어려운, 권위를 내포한 듯한, 어떤 통제적인 힘으로서 감각되고 인식된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거대한 장벽 앞에선 인간은 편안함 보다는 긴장과 불안, 두려움과 같은 정서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자동화된 정서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경계를 향해 달려드는 무모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정신줄을 잡아주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마음만 먹으면 넘을 수 있을 법한 정도의 경계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앞 집 담장 같은, 도움닫기에서 점프와 매달리기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운동을 통해 충분히 넘나들 수 있을 정도의 것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경계를 마주한 자의 연령대에 따라 매우 다른 태도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당신이 이미 철든 어른이라면 이웃집 담장이 눈에 들어와도 보통은 넘어보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본체만체하며 지나갈 확률이 높다. 이러한 건조한 무반응(인지적 비활성화)는 사회화로 인한 결과인 텐데 이 부분은 조금 더 뒤에서 다뤄보기로 하자.
이와 다르게 어린이로 분류되는 나이의 존재에게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호기롭게 높은 담 위로 올라가서는 저 너머로 뛰어내렸던 시절을 생각해 보자. (어린 시절 경험한 주거지 환경의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주변 담이란 담은 다 넘어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지 않는가? 아직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어린이들에게 ‘담’이라는 경계는 자신의 용맹스러움을 뽐낼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된다. 물론 걸리면 엄마나 아빠, 앞 집 아저씨에게 혼날 수 있다는 걱정과 긴장감과 같은 감정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우리는 보통 감정에 오롯이 지배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넘을 수 있을 법한 적당한 높이의 물리적 경계 앞에서, 충분히 굳어지지 않은 심리적, 내재적 경계는 부드럽게 휘어버린다.
경계는 또 한 편으로는 그렇게 부드럽다. 물질적인 실재 없이도 내재적으로 작용하는 규범, 관습과 같은 사회적 경계는 심리적 주체가 어떠한 상태인지에 따라 견고하기도, 또 유연하기도 하다. 꼭 어린이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경계를 밥 먹듯 넘나드는 인간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 사회는 그들을 범죄자로 분류해 보통의 시민과는 다름을 규정하고 선을 긋고 경계를 짓는다. 심한 경우 물리적인 구조물을 통해 격리되기도 하는데, ‘법률’을 지키지 않음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실재하지 않는 경계를 넘어 보려다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경계에 속박되는 꼴이라니.
법률은 사회적으로 합의한 일종의 개념(concept)으로서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경계일 뿐, 그것이 문서화되었다 해서 물질적으로 실재한다 할 수는 없다. 문서화된 것이 실재한다면 인간이 그간 창조한 수많은 소설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복잡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유형의 것이 아닌 이러한 ‘가상의 경계’로 인해 실재적인 우리 행위에 제약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목줄에 묶여있는 것처럼 말이다. 운전을 하다가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일상적일 때의 우리 몸은 자동적으로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며 브레이크를 밟는다. 그러나 1초를 다투는 다급한 상황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닐 때는 신호고 뭐고 무시하고 질주할 수 있는 것은 이 경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합의’이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에 독일을 둘로 나눴던 실체적 경계인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그 견고한 물성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던 민주화 시위와 더불어, 결정적으로 이 거대한 경계가 무용지물이 된 계기는 당시 동독 최고 지도자의 기자회견장에서의 말실수와 이를 들은 기자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전한 오보였다고 한다. 누구든지 장벽을 넘으려 한다면 즉각 사살하라는 명령과 함께 시민들에게 긴장감과 공포심을 주었던 3.6미터 높이, 폭 1.2미터의 경계는 어떠한 물리적 힘도 아닌, 무형적인 말과 이에 대한 오해가 촉발한 관념의 전환으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긴다.
이처럼 유연하고 형태가 없는 것만이
틈조차 없는 사이로 들어갈 수 있다.
천하지지유天下之至柔,
치빙천하지지견馳騁天下之至堅.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
도덕경 43장
경계의 본질은 그래서 허술하다. 어쩌면 허구적인 것, 혹은 우리 마음이 빚어낸 것에 가깝지 않을까. 마음에 따라 경계는 단단해지기도 또 유연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경계의 본질은 굳이 따져보면 돌보다는 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넘어설 수 없고, 변형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인 것이 아닌, 이리저리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고체로, 때로는 기체로도 변화하는 물처럼 말이다.
언젠가 거리를 걷다가 공사장 가림막의 존재가 무색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풀과 나무와 새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사현장과 인도를 구분하고 차단하기 위해 만든 인위적 경계, 그리고 이런 인간의 경계지음과 그것을 비웃듯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식생의 대비 속에 해학이 있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에 등장한 어리석은 사람은 보지 못하는 특별한 옷처럼 우리가 생성하고 있는 경계는 때로 웃프다. 인간이 지어낸 경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들을 보며 스스로가 만든 허술함에 갇혀 앞으로는 전혀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들의 현실을 떠올려 본다. 옳고 그름의 경계,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경계,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경계, 나와 타자를 나누는 경계…. 수많은 유무형의 경계들에 포위된 우리들의 삶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