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경계 시리즈 - 노자 도덕경 7장
얼마 전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90년 이상을 사신 할머니는 이빨도 다 빠져버렸고, 자력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볼일을 보는 것도 힘겨워했다. ‘요양원에 들어갈 거야’를 반협박처럼 힘들고 서운할 때마다 입에 올렸던 것 때문일까? 그 말들이 마치 부메랑처럼 돌아온 듯 결국 할머니는 생의 마무리를 위해 요양원에 맡겨져야 했다. 마치 갓난아이로 돌아간 듯,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상태, 아마 나도 당신도 언젠가 겪게 될, 이것이 한 인간의 최종장이라니... 황량한 바람처럼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요양원에 맡겨지기 전 할머니를 마주 했을 때,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떠올랐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시간이 갈수록 어려져 가는 한 존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려져 요양원에서 돌봄을 받으며 자라게 되는 아이. 영화 속 벤자민은 마치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노인 → 중년 → 청년 → 청소년 → 유년’으로 역행하며 성장하고 변화한다.
생의 마지막에 다가갈수록 갓난아이가 되어가며 모든 기억과 몸의 통제력을 잃어가는 주인공처럼, 할머니의 눈빛과 표정, 여러 모습에서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딸아이의 모습이 중첩되어 보였다. 특히 위아래 이가 없어서 입술을 자꾸만 앞으로 삐죽하는 모습이 그랬다. 할머니가 긴 시간을 거쳐 결국 도착한 지점과 내 딸아이가 삶을 시작하는 지점이 마치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그림처럼 동일하게 느껴진다.
할머니에게 내재된 어떤 생명의 본질이 새로 태어난 증손주에게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할머니의 삶을 일으킨 자연의 본질적 힘이 단일 개체의 소멸과 함께 흩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의 삶을 일으키고, 나를 일으키고, 다시 내 아이의 삶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체로서의 삶은 흩어질지라도, 그 생명력, 생명의 본질은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위축됨 없이, 오히려 갈수록 거대해져 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라는 것에 굳이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삶의 무한성이라는 것도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경계 밖에서도 우리들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니.
천지 자연은 장구하다.
천지 자연이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자신을 살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생할 수 있다.
성인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앞서게 된다. 그 자신을 도외시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보존된다.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기준이나 의욕을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능히 그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노자 도덕경 제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