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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Dec 04. 2023

집나간 멘탈을 잡아드립니다.

다정하게 대해주는 남자를 못견뎌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휴대폰 저장이름은 20년째 '큰둥이'. 사람들은 '큰 귀염둥이'라서 큰둥인줄 안다. 천만에. 매사 시큰둥해서 큰둥이다.


엄마는 얘기한다. 그래서 니가 아직 좋아하는거라고. 사람취향은 역시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내게 연애시절 '신정환'을 닮았다고 했다. 어깨가 좁은 나는 당시 어중간한 단발에 파마를 하고 있었다.


만난지 100일째 되던 날은 치마를 입고 왔더니 그는 인사하는 것도 잊고 100m 밖에서부터 박장대소를 하며 다가와 말했다.


"그동안 니가 왜 치마를 안 입은줄 알겠다."


연애가 무르익은 어느날, 나는 그에게 뻔한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나 죽으면 어떨거 같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한다. 땡!! 일단 그거부터 글러먹었다.


"얼마간 힘들겠지만, 또 그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겠지."


정답! 그렇지만, 분명한 오답! 땡땡땡!!!!!!!! 때~애앵!!!!!!!!!!!!!!! 땡!!!


당장 따라죽겠다는 빈말로 거짓말인 줄 알지만 감동을 받게 하거나, 장난스레 바로 다른 여자 만나야지 했어야지!! 내가 죽어도 삶은 지속되고, 열심히 산다는 정답을 내놓으면 너무 서운하잖아?


친구의 남자친구들과 사뭇 다른 그의 행보에 나는 범죄도 비켜나갈 수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호랑이가 담배도 태우던 그 시절. 네이트온이 흥할 때였다. (혹시 모를 MZ에게 설명하자면 요즘 카카오톡 같은)


(여하튼) 011사용자에게는 문자메세지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는데, 그는 누나의 이름으로 네이트온에 접속했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그가 네이트온으로 말을 건다.


"일해?"로 시작한 대화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다 "나 500만 보내줘. 누나가 급한 일이 생겨서 돈이 좀 필요하대~"로 이어진다.


예비 시누에게 그렇게 다급한 일이 생겼다고? 갑자기? 그런데...어라? 뭐지? 차가운 내 남자에게서 낯선 따스한 향이 풍긴다.  


"너, 우리 오빠 아니지??"


"왜 그래, 00아(애칭까지 부르며)~ 오빠, 못믿어??"


"그래??? 그럼, 오빠 내가 지금 전화할테니 받아."


"그래, 해봐."


느긋하게 해보라던 놈은 바로 로그아웃했고, 전화를 받은 남친은 당연히 모르는 일이었다.


보이스피싱? 스미스피싱? 무튼 범인은 그가 누나의 이름으로 접속해 내가 여친이며, 그 여친을 뭐라 부르는지까지 조사해서 접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몰랐다. 그렇지. 꿈에도 몰랐겠지.


내 남친이 나를 물결표시(~)까지 써가며 예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란걸. 마침표 딱딱 찍어가며 말하는 사람이 내 남자다. 그리고 그는 "오빠 못믿어?" 따위의 의문형을 품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의 변함없는 매력에 빠져 오늘도 어떻게 한번 홀려보고자 노력하지만, 그는 여전히 본캐대로 시큰둥하게 살고 있다.


그리고 그의 화법은 날 정신 똑바로 차리게 하는 찬물 같은 마력이 있다.


최근 다채로운 노력을 하고 있다. 지구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는, 슬슬 힘들다. 육체적 힘듦이 정신적 고단함을 몰고 온다.  


"힘들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아. 진이 빠지네.."


"그래도 해."


쳐다도 보지 않고, 탁구공 튀겨내듯 말한다.   


"응???"


"그래도 해야 된다고. 안그럼 진짜 밑이 빠져."  


아..... 그렇지. 정신이 번쩍 든다. 배가 부른 소리다.


신이 나서 열심히 다하다가, 독이 적당히 차니 그때부터는 슬슬 팔도 아프고, 잠도 오고, 배도 고프고. 꾀가 나기 시작한다. 속도가 줄고 거대한 독은 도무지 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밑이 빠졌나? 허리를 굽혀 바닥을 보니 작은 실금이 보인다. 거기서 슬금슬금 새어나오는 물줄기가 보인다.  


그래, 밑 빠진 독이라고 물을 붓지 않으면 정말 밑이 빠진다. 계속해야 한다. 킵고잉.

 

독이 꽉 차서 넘치든, 독이 더이상 견디지 못해 와장창 깨지든 할 때까지. 그때까진 막다른 길이다. 


내겐 선택지가 없다. 무조건 간다. 간다, 할 수 있다. 같이 가자! 우리는 할 수 있다. 인생의 진리가 있다. 끝까지 남는 자가 결국 남는다.

  

불가능은 가능하지 않다.


애시당초 그랬다. 내겐. 그리고 우리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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