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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Dec 14. 2023

디어 다이어리

dear. diary.  


안녕? 어색하다. 너랑 이렇게 대화를 나눈다는게.


사실 우리 늘 함께하면서도, 내가 너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넨건 처음이잖아.  


너를 처음 만난게 고등학교 때던가? 아니아니, 학교에서 쓰는 숙제 말고. 그냥 스케줄러 겸 일기 겸 메모장을 모두 해결해주던 '진짜 너'말야.  


요즘 '다꾸 다이어리'라고 스티커며 이런저런 아이템 들로 꾸미는 게 유명이던데. 원조는 우리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때 아니겠어? 웃긴다고? 너도 고등학생이라고 '우리'라고 한 거?


너는 나의 그림자 이상의 분신과 같은 존재니 우리 나이는 갑이거야. 아직도 모르겠니?? 아유, 너는 참 한결 같다. 내 얘길 들으면서 그렇게 남 얘기처럼 받아적는 것도 그렇고.  


근데 그거 알아? 한번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지만, 너는 그렇게 매일 내 얘길 모두 받아적고 하나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어. 나는 그걸 알고 있어. 그냥 아는 척 하지 않았을 뿐이지. 가끔은 놀랄 때도 있었는 걸?


'아니, 얘가 이런 것까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무서운 애네..위험한 존재야. 나중에 너부터 태워야겠다.'


우린 한번도 대화같은 대화를 핑퐁처럼 나눈적 없지만 이렇게 오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거야. 서로 가장 내밀한 것을 아는 사이.


사실 처음 너와 만났을 때는, 각종 알록달록한 펜과 스티커로 무장해서 좋아하는 노래가사며, 친구들의 생일, 롤링페이퍼 등 편지들로 채워져 있어서 니 배가 참 빵빵했지.


기억나?


거의 30년 전이지만 한 자루에 1800원하는 하이테크펜이 당시에 유행이어서 필통 한가득 색깔별로 채워놓았는데,  그걸 몽땅 잃어버려서 그때부턴 그냥 친구펜 빌려서 너를 채워 넣었지. 내 친구들은 모두 기꺼이 자기 펜을 빌려줬지. 내 다이어리를 구경하는 걸 좋아하고 자신의 다이어리도 꾸며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으니까.

 

습관 참 무섭다. 아직 끄적이는 걸 좋아하니 말야.  


한결 같은 모습은 아냐. 여고생의 로망이 쫙 빠져서 지금은 본질만, 아니 생존만 남았지. 남에게 보여주기보단 나의 하루, 일상, 미래를 채우고 기록하고 다짐하는 일 말이야.   


첫 직장생활이 기억난다. 그 다음 회사도.


나는 늘 다이어리를 참 잘 쓰는 사원이었어. 회의시간에도, 대표님 결재를 받아야 할 때도 다이어리를 항상 소지하고, 뭐든 메모해서 칭찬도 많이 받았지.


"자세가 됐다"


오랜 습관이다 보니 사실 하는 척 제스처만 취할 때도 있었지. 이유야 어쨌든 뭐든 받아쓰고 별표한 덕분에 잊어버리지도 않고, 직장생활에 정말 큰 도움됐어.


아, 그런 적도 있었다.


"이번 회식 때는 황구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황구?????'


일단 쓰고 동그라미 동그라미, 물음표, 별표를 해놓았더니, 옆에서 잠자코 보던 팀장님이 나와서 귀띔해주시더라.


"개고기."  


'하는 척'이라고 했지만 그런 제스쳐가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여는데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몰라.


인터뷰할 때도 그랬어.


녹음기를 꺼내놓기보다는 다이어리를 조심스럽게 펼쳐 키워드 중심으로 잘 받아쓰고 기록하며 눈을 열심히 마주치는 내게 인터뷰이들은 참 많은 얘길 들려줬지.  


어느날은 선배가 그러더라.


"그 사람들이 너한테 이런 얘기까지 해줘?"


난, 그런 것도 다 니 덕분이라고 생각해.  


녹음기를 켜면 조금 더 정확하고 전문적인 느낌을 줄 수는 있지만, 심리적으로 코너에 몰린 기분이 들겠지. 다소 고압적인 태도라 느껴지지.


그런데 반해, 눈을 마주치며 한마디 한마디 듣다 고개를 끄덕이다 부지런히 사각사각, 메모하는 소리는 인터뷰이들에겐 존중과 경청의 느낌이었을 거야.  


'아!!! 이 사람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있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젠 학생도 아니고, 회사원도 아니지. 365일 열 두달. 24시간. 지루할 정도로 매일이 같은 주부야.


그래, 요즘 내겐 새삼스러운 일이란 그야말로 이벤트 수준이야. 그러니 지금은 굳이 너를 펼쳐보일 일도, 기록할 일도 많지 않아.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시간도 별로 없고. 씁쓸한게 아니라 전업주부라는 게 원래 그래. 넌 잘 모르겠지만.


뭐라고? 분신같다고 하면서 그런 것도 모를 거라고 무시하냐고? 아니아니, 그냥 그렇단 얘기야.  


그래, 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도 알잖아.  


아이 방학, 개학. 남편 연차, 휴가. 양가 경조사 같은 게 있지만 그건 십년, 이 십년이 된 일이니 별다를 게 없지. 그것조차 일상이지. 그러니 뭐 유별나게 기록하고 펼쳐보고 체크하겠어.  


그래도 나는 습관처럼 매년 12월이 되면 새해와 꼭 어울릴 너를 찾는다. 알고 있니?  


나름 예민하고 꼼꼼하게 골라. 의미있는 연례행사니까.


우선 적당한 두께와 적당한 가로x세로를 가져야 해. 너무 두껍거나 크면 가방에 넣어다니기 힘들어. 아주 작은 핸드백이 아니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적당한 사이즈는 되야 다이어리의 역할을 할 수 있지. 또 펼쳤을 때 쫙 오른쪽 왼쪽이 굴곡없이 펴져야 수요일이나 목요일이 접히지 않아.  


캐릭터가 그려진 것은 두어 달 지나면 질릴 수 있고, 그 화려함에 나의 중요한 감정, 일상이 감춰질 수 있으니 피하는 편이야.


그렇게 고른 너로 한해를 시작해. 아니, 한해가 시작되기 전월 12월부터 카운트다운. 새로운 너를 기다려.  


시작될 경조사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걸로 시작해서, 한해 꼭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 다짐을 쓰고 책장을 닫아 두 손을 모으고 크게 심호흡을 하지.


'잘 할 수 있을거야.' 


크고 맑은 기운을 나 스스로 불어넣는거야.  


너, 그렇게 내게 큰 존재다? 뭘 빼곡히 채워넣어야 필요한게 아냐, 이제는. 그냥 그 존재만으로도 365일을 허루투 쓸수 없게 하는 거야. 매일매일을 채워넣고 싶다는 열망으로, 의지로 안달나게 하는게 너야.  


올 한 해도 니 덕분에 날 지냈어. 존재의 이유가 있든 없든, 큰 쓸모가 있든 없든. 늘 말없이 내 곁을 지켜줘서, 가방 안에서 자리해줘서 고맙다.


나의 러닝메이트! 내년도 잘 해보자.


부디 쓸일이 점점 많아지질. 우리의 리즈시절, 전성기가 다시 오길 고대하며.


아듀! 2023! 웰컴!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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