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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May 25. 2024

속수무책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인과응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속수무책'


내게 생긴 일은 있는 줄도 몰랐던 의지를 불어 일으켜 영혼까지 활활 불 태운다. 고난은 이겨내는 맛이 있다. 어디 한번 붙어보는 거다.


생을 다하지 않을 거라면 별 수 없다. 이대로 그냥 울어? 좌절해? 포기해? 누구 좋으라고? 어차피 사는 거 그냥 한 번 해보는 거다. 똘기 있게. 니가 이기든지, 내가 이기든지 이런 자세로.  


근데 나와 이웃한 이에게 생긴, 열심히 생을 최선을 다해 살던 이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에는 면역이 생기질 않는다. 방법을 모르겠다.


나에게는 사촌오빠가 있었다.


야구를 하던 오빠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큰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렸던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복잡한 사정이 무슨 오해를 만들었는지 오빠와 친가는 연락이 끊겼었다.


성인이 된 오빠와 나는 우연찮게 만나고 연락하게 됐다. 이런저런 얘길하다 오빠가 작은 가게에서 쓰는 영업용 석수 물통을 짊어지고 배달하는 알바를 하며, 편입을 위해 공부하는 중이며 강의실 바닥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빠에게 얘기했고 얼마뒤 오빠는 아빠의 가게에서 알바를 하며 원하는 곳에 편입했다. 전공분야에서는 유망한 서울의 이름난 대학에는 모두 붙었다. 어렵지만 열심히 사는, 그리고 똑똑한 조카를 친가에서도 모른 채 하지 않았다.


친남매처럼 서로 의지하고 지냈지만, 내가 먼저 결혼을 했고 오빠도 결혼해서 제주로 내려갔다. 종종 안부를 물었지만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


잘 살겠거니 했다. 자기는 잘 생겨서 인기가 많다고 하더니 영 뻥은 아니었는지 최고의 신붓감이라는 초등학교 교사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도 했다. 아이도 둘이나 낳고 제주도에서 설계 사무소를 열고 사업도 한다니 잘 사는 줄 알았다.


해피엔딩인 줄 알았다.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세찬이 암이래."


엄마에게 들은 날벼락 같은 소식. 자세한 상황 파악을 위해 오빠의 누나, 사촌 언니에게 곧장 전화를 했다. 직접 전해 들은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더 기가 찼다.


그 흔한 보험 하나 들어 놓은 것 없고, 암은 이미 전부 온 몸에 퍼졌다고. 전화를 끊고 방에서 나와 다시 엄마에게, 아빠에게 소식을 똑바로 전했다.


이야기는 삽시간에 친가의 구석구석 전해졌다.


큰아빠, 작은아빠들 모두 제주도에서 CD를 받아 이름난 병원으로 저마다 찾아가 소견을 들었고, 대개는 어렵다는 얘길 들었다. 딱 한 곳, 그곳에선 환자가 아직 너무 젊으니 그냥 죽을 날 받아놓고 기다리긴 아깝다고 한 번 시도라도 해보자고 했다.


좋은 소식이라 전했지만 늦었다. 머릴 열었지만 뇌압이 높아 닫지 못하는 상태라 지금은 헬기를 띄워 줘도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했다. 뇌압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결국 아무 것도 아닌게 됐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또 다시 화가 치밀었다. 왜 상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오빠는 뭐하고, 새언니는 뭐하고, 사촌 언니는 뭐하고, 나는 뭐하고 있었고 다들 이렇게 몰랐지? 얼마 뒤 오빠가 죽었다.


슬픔보다 화가 났다. 이렇게 허무한 게 삶이라니. 열심히 살아도 순간에 모든 게 사라지는 게 삶이라니. 열심히 살았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 지경이 된 거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신이 있다면 그러면 안 되지. 이건 아니지.


첫째는 초등학교 저학년, 둘때는 미취학 아동.


"애들한테는 얘기했어?"라고 물었더니 언니가 "아빠는 하늘나라로 갔어. 너무 아파서 하늘나라로 갔어. 이젠 안 아프려고 간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 우린 못 봤는데. 고모는 봤어? 아빠 하늘나라로 가는 거 봤어?" 말했고, 언니는 "그럼, 봤지. 너희가 가지 말라고 하면 못 갈거 같아서 고모한테 부탁하고 갔어. 너희 공부 잘 하는 지, 건강하게 잘 크는 지 잘 봐 달라고 했어"라고 말했다 한다.


딱, 일주일 뒤 새벽녘 친하게 지내던 중국인 동생이 남편의 사기혐의로 경찰서에 간다고 전화했다.


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남편이 변호사라는 것도, 어마어마한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도, 심지어 이혼 소송 중인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기혼이었던 다.


그가 그녀에게 한 말은 모든 게 다 거짓이었다. 정말 착한 애였는데, 너무 밝고 예쁜 아이였는데.. 그 남자 하나 믿고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한국에 눌러 앉았는데.. 아직 20대 중반 젊은 아이였는데.


그 즈음 동생이 억대 사기를 당해 돈을 날렸다. 안 먹고 안 쓰며 돈을 불렸던 걸 알았기에 여러 모로 화가 났다. 얘가 얼마나 독하게 모았는데 그걸 한 입에 털어넣어? 대충 들어도 사기꾼 같은데 등신도 아니고 그렇게 사람 조심하라고 했는데.


안 그래도 미치겠는데, 막 결혼한 아주버님 내외가 이혼하겠다고 난리였다.


우스꽝스럽게도 하필 내가 이혼의 중심에 있었다. "쟤는 뭔데 하는 것도 없는데 다들 쟤만 예쁘대?" "딸처럼 잘 하잖아. 저만큼만 잘 해 봐." 대충 들어도 낯 뜨겁고 구차한 코미디였다. 나이 들어서 하는 짓들이라니, 처음엔 웃으며 콧방귀를 꼈지만 은근히 데워지는 방구들처럼 나중에는 펄펄 끓었다.


열심히 사는 착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는 거지? 왜 모든 상황이 종결된 상태로 내게 전해지는 거지? 우린 왜 이렇게 속수무책이지? 난 왜 아무 것도 못하는거지?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본래의 성격 대로 잘 사는 듯 했지만, 문득문득 치밀어 오는 분노는 나를 끊임없이 태웠고, 나는 좌절했고, 나는 사라졌다.


전문가로부터 당신 탓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도 내가 아무 것도 못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무력감은 사라지질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일이 쉬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휘몰아치니 작은 일 하나에도 예민해졌다. 어느 날은 귀에 대고 누군가 꼭 속삭이는 거 같았다.


"어라? 아직도 안 죽었네? 너 이래도 안 죽을래? 니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어쩔 수 없이 기분 탓이지만. 모든 게 다 기분 탓이지만. 그 망할 기분이 참 나빴다. 누가 더럽게 내게 이런 걸, 이 따위를 주문하는 거야. 이 따위 기분까지 느끼게 한  실수야. 이러면 나는 또 그냥 주저 않을 순 없지. 턱 근육이 콱 뭉쳐졌다.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아이를 봤다. 아니 보였다. 그간 무력감에 빠져 나 밖에 보이지 않고, 나만 탓하다가 아이가 또렷이 보인 날이었다. 너무 해맑게 웃고 놀고 자는 아이. 엄마, 엄마, 아직 내가 전부인 아이.


정신 똑바로 차려, 내가 어쩔 수 없는 남의 일로 잘못 되면 저 아이만, 내 새끼만 불쌍해지는 거야. 누구 좋으라고 내 새끼를 불쌍하게 만들어?


전문가의 말에도, 약에도, 그 어떤 위로에도 도움에도 더 아래로, 아래로 내 살을 끝없이 파헤치며 안으로 들어가던 나를 살린 건 나 자신이었고, 아이였다. 아이의 미소를 보고 다시 나를 찾았다.


변한 건 없지만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달리 보기 시작하자 그 누구도 끌어낼 수 없던 내가 단숨에 밖으로 스스로 뛰쳐 나왔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꽤 흘렀다. 타인과 적당한 거리, 적당한 교류, 적당한 관계성을 지키며 나도 지켰다. 모든 게 평화롭고 순조롭고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며칠 전


아이의 친구 엄마가 출산을 했다. 삼 칠일이 지나고 신생아 태를 벗었을 때 "더 크기 전에 한번 놀러오세요. 지금 한창 예뻐요"라고 연락이 왔다.


마감 하나를 끝낸 약속한 날, 가벼운 마음으로 맛집에 들려 연어 포케와 리코타 샌드위치를 포장했다.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시원했고, 경쾌한 사람들의 소리가 거리 위에서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이 가득한 그런 날이었다.   


"어서 와요. 밖은 덥죠?"


실내에서 유모차를 밀며 아이를 돌보는 그녀에게 "아우, 며칠 새 이렇게 더워졌어요." 말하고 손을 씻으러 들어갔다. 그녀는 식탁 위에 두 개의 접시를 꺼냈고, 나는 포장해 온 것들을 펼쳤다.


아뿔싸! 소스가 없다. 점심 시간이라 바빠서인지 가게에서 빠뜨렸다. 그녀는 냉장고에 있는 발사믹 소스를 꺼내 뿌려서 슥슥 비벼 한 입 떴다. 나는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아이 아빠가 많이 아파요."


고개를 푹 숙이고 포케를 먹는 그녀의 눈이 붉다. 뭐지? 잘 흘러가던 시간이 갑자기 정지됐다. 샌드위치를 손에 든 채 나는 잠시 생각하고 물었다.


"감기, 코로나...이런 걸로 아프다고 할 것 같진 않고. 어디가 아프길래 그래요? 많이 아파요?"

"네, 많이 아프대요. 손을 쓸 수가 없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갑자기 아프고, 손을 쓸 수 없고. 그럼 하나 밖에 없는데. 설마? 구태여 입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닐 수도 있잖아란 생각을 했지만 나는 어느새 샌드위치를 내려 놓았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 힘내요. 요즘 의학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방법이 있을 거야."


"가장 나쁜 암이래요. 진행속도든 고통이든 뭐든 최악의 케이스래요. 지난 번엔 신장 조직을 떼어냈는데, 오늘은 어깨 뼈를 뜯어내 검사하러 갔어요. 길면 6개월이래요. 진통제도 안 들어요."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부턴 위로도 할 수 없다. 아이 아빠는 1박 2일 검사를 받고, 입원하러 갔고...아이 엄마는 우는데... 나는 할 말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이 집 아빠..... 처자식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얼마 전까지 몇 년씩이나 해외에서 일해서 한국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첫째도 어리고... 막내는 이제 한 달된 젖먹인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손 쓸 새 없이 이렇게 죽음이 눈 앞에 닥쳤다고? 그게 삶이니까 받아 들이라고? 고분고분 그냥 죽으라고?


내가 겨우 꺼내고, 생각해 낸 말은 휴직이었다. 쉬든 치료를 받든 어쨌든 휴직이 필요하다 느껴졌다. 기적이란 것도 있고, 의사들이야 원래 3개월, 6개월 좋아하니 그냥 참고만 하더라도, 만약 혹시 정말 그렇다면 아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야지. 진통제가 안 들을 정도로 고통이 심해 잠도 못 자는데 회사를 갈 순 없지.  


"그 얘기도 나왔는데. 이제 자기 없으면 수입이 끊긴다고 꾸역꾸역 나가요."


눈 앞의 화자는 꾸역꾸역 밀어넣던 숟가락을 내려 놓고 엉엉 운다. 갓난쟁이를 안고 집 구석에 쳐박혀 답답해서 겨우 생각해 낸 사람이 난데, 나란 사람은 할 말이 없다.


암담하고 답답하고 기가 찬다. 없이 사는 집도 아닌데 그게 또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일하다 가면 남은 와이프와 자녀들의 가슴에 얼마나 상처가 되는데.  이러는거지 이사람. 이러면 안되는데.


"죽으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살 방법 안 줘요.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기적도 있는 거지. 혼자 저렇게 죽을 날 받아놓고 일만 할 순 없잖아요. 그럼, 너무 외롭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 착하고 성실한, 저물기엔 아직 아까운 어느 한 생명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일. 발을 동동 구르며 그저 안타까워만 해야 하는 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 하지만 타인과 나, 선을 분명하게 긋고 끊어 내야 하는 일. 그래도 마음에서 못 놓는 일. 그래도 시간은 가는 일.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 속수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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