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하얀 겨울은
멈추지 않을 나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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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8. 2025
당신의 하얀 겨울은 어떤 모습인가?
군밤, 군고구마로 미각을 돋우며 시작될 수도 있겠고,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당신이라면 몸서리쳐지는 냉기를 느끼며 목도리, 장갑 등 촉각을 자극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게 하얀 겨울은 시각이요, 청각이다.
"딸랑딸랑"
저 멀리서도 청량하고 명료하게 들리는 종소리. 소리를 따라 돌아보면 보이는 빨간 옷을 입은 구세군.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빨간 통.
슬그머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만지작 거려보는 지폐. 수줍은 표정으로 슬쩍 밀어 넣는 나, 부끄러움을 한껏 더 달아오르게 만드는 커다란 소리.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누며 살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나눔은 내게 더불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뭐 하나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전의 나는 철이 없어 아무것도 몰랐을 뿐.
어른이 된다는 건 생각이 많아지고, 이유가 많아지는 것 그래서 결국은 미루게 되는 것. 씁쓸한 일이었다.
봉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이 열린 대학을 갔고 거기서 처음 세계에 입문했다. 한 학기는 종합병원 중앙공급실 용품정리, 한 학기는 장애인복지관 청소를 하며 지냈다.
내게 봉사란 어떤 판타지였던 걸까?
수술 준비를 도울 수 있도록 깨끗하게 멸균 세탁된 것들을 잘 정돈하는 일. 지하 수치료실을 잘 닦는 일. 여러 의미를 애써 부여해 봤지만 의욕이 나질 않았다. 매번 혼자였고, 왠지 두렵기까지 했다.
나는 철이 없고, 어렸던 걸까.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일은 보람보다는 고됨으로 돌아왔다. 일에 대한 회의감, 나에 대한 실망감. 그런 것들을 얼마쯤 고민하다 그 고민마저도 귀찮아졌다.
내게 봉사란 어떤 판타지였던게 분명하다.
아동복지회, 보육원 봉사를 직접 알아보고 들어가고자 했다. 친구에게 의지를 전하자 그는 말했다.
"지속적으로, 끝까지 할 수 있겠어? 변수가 많은 나이지 않아? 기분에 취해서 몇 번 오다 안 오면 남아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받는지 알아?"
유독 그 친구는 허를 찌를 때가 많았는데, 그날 받았던 부끄러움이 아직 생생하다.
지속적으로, 끝까지.라는 말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예측 가능한 무수한 변수를 떠올렸고 '다음'을 자연스럽게 기약했다.
그러다 결혼을 했다.
배우자는 대학생 시절부터 소액이지만 십 년이 넘게 매달 끊임없이 나눔을 이어오고 있었다. 말보다 실천이 많은 사람이긴 했지만 다시금 사람이 새로 보였고, 그를 닮고 싶었다.
거대한 것보다 작은 것에서 의미를 찾고 조용히 실천하는 깊은 마음에 나는 홀렸다.
그는 또 기회가 될 때마다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독서가 취미인 그는 졸업 당시에 좋은 구절을 모아놓은 걸 책으로 엮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책값을 지불하겠다는 이들에겐 3,000원 미만의 돈을 받아 모았다. 좋은 일인데 취지를 알리고 주는 건 다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이유로 책을 받는 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책값으로 받은 작은 마음들은 그의 고향 모교 은사님을 통해 어느 소년에게 전해졌다.
그다음에도 그는 책을 엮었다.
더 많은 권수를 찍었고, 이번에는 더 주겠다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쩐 일로, 왜,라고 묻지는 않았다.
이 또한 전액, 어느 단체에 전했다. 역시 절대적으로 큰 금액은 아니었다.
나는 이걸 가지런히 정돈하고 사과즙 상자에 넣어 편지와 함께 전했다. 사과 상자에 담긴 검은돈이 뉴스를 장식할 때였다.
결혼을 했을 때는 각자의 축의금을 모두 양가 부모님에게 드렸지만 그는 축의금의 작은 부분을 떼어 기부하고 싶어 했고 나도 동의했다.
연말에는 해당 기관의 행사에 초청됐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뒤 '기부'를 주제로 한 공중파 방송사의 유명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우리가 나왔다. 그건 알고 있었다. 행사 때 촬영진이 와있었고 장면이 찍힐 수 있다고도 설명을 들었으니 말이다.
근데 자막에 '축의금 전액 기부'라는 글씨가 도드라지게 들어왔다. 적은 금액이지만 보람된 실천이라 생각했는데 '전액'이라는 글씨에 우리가 나눈 것에 대한 의미와 가치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은 해프닝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아니 남편은 변함없이 20년이 넘게 매달 소액 기부를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다달이 정기적으로 내는 것 외에도 상황에 따른 나눔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남편은 부부니까 같이 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아니. 나는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매달' 이어갈 수 있는 기부.
나도 내 힘만으로 하고 싶었다.
가슴 한편에 죄책감일지, 부끄러움일지, 질투일지 모를 감정을 품고 삶을 부지런히 살았다. 더 열심히 사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나 나름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올해.
생리대가 없어 곤란한 소녀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한 NGO 단체의 광고를 통해 보게 됐다.
꽤 오래전이지만 직장 생활을 할 때 저소득층 여성의 경우 보건소에서 생리대를 지원받을 수 있지만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한 이들도 많다는 이야길 들은 기억이 났다. 커지는 몸에 맞는 속옷도 제때 사기 힘들겠다는 생각까진 못했지만.
마침 매달 받는 원고료의 단위가 내가 정한 최소 금액을 넘어선 때였다. 경조사, 집안일에 일이 있을 때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 금액선을 맞춘 때였다.
작지만 내겐 의미 있는 첫 나눔의 단추를 그날 신중하게 끼워 넣었다.
그리고 잊었다. 그야말로 내가 생색을 내지 않을, 일상과 함께 버무려진 금액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주말. 나는 모든 것을 끌어모아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연말을 맞아 해당 단체에서 발송한 모바일 카드 한 장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첫 마음을 기억하냐는 그들의 첫 물음.
내가 쓴 첫 마음.
아, 그랬지. 맞아. 내가 이렇게 썼었지.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여 모바일 카드를 몇 번이나 넘겼다.
카드 마지막 장에는 새해 나눔 계획에 넣고 싶은 키워드를 골라보라고 했다.
희망, 공감, 행복, 변화, 성장, 실천 중 가장 눈길이 가는 딱 한 가지만. 나는 '성장'을 골랐다.
이건 내게 후원단체가 후원자들에게 단체로 보내는 단순한 모바일 카드가 아니었다.
올 한 해 혼자만 살지 않았다는 스스로에게 전하는 나만의 성탄 카드.
부끄러움을 잊지 않고 가슴에 오래 품어, 이제 실천하기 시작했단 나만의 성장 나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