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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Jun 29. 2023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사는 그들과 함께 산다는 것

그들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부지런히 듣고 보고 싶다

화장실을 가다가 여자 장애인 화장실 앞에 우뚝 선다. 그리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바로 옆 남자 장애인 화장실을 본다. 두리번 두리번. 번갈아 본다.  



'여긴 남녀, 점자 표시가 제대로 된걸까???'


간혹 뒤바뀐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아니 봤다.  






날이 덥다.


시원한 콜라, 사이다 사이에서 잠시 망설인다.


짜장면, 짬뽕처럼 늘 고민된다. 나름 행복한 고민이다. 고를 자유가 있고, 원하는 걸 때마침 먹을 수 있다는 건 확실한 '소확행'이다.


그러다 나는 또 그를 생각한다.


원샷한솔! 나의 인친(물론 나에게만 ㅋ)


시각장애인에게 마실거리는 '음료'와 '탄산'으로만 구분되어 있어 사이다, 콜라 중 무엇을 마실지.. 이온음료와 과실음료 중 무엇을 마실지ᆢ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들에게 선택지는 정말 둘밖에 없다고 한다.  






조금 예민한 이야기다.  


장애인들이 출퇴근 지하철을 타며 시위하는 이야기. 시민들이 불만을 늘어놓는다.


"꼭 저렇게 해야 해? 저 방법 밖에 없어?"  


물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중 한명은 나의 지인이다.  


"저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르잖아. 저렇게까지 해야지 사람들이 보고, 들어주고, 생각해보잖아.


우리에겐 매일 있는 일도 아니잖아. 저 사람들은 매일 불편해. 우리가 불편한거 조금만 참으면 돼. 그러면 저 사람들이 조금 더 살기 편해져."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한솔 씨를 생각했다.


그의 수많은 피드 중 "왜, 복지콜(시각장애인 특별교통수단)을 타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느냐"는 악플에 대한 실험(?) 영상이 있다.   


그의 영상에 따르면 복지콜을 타기 위해 불렀지만 두시간 동안 배차가 되지 않았다.  


영상출처 : 인스타그램 원샷한솔



이쯤되면 ᆢ노래가 생각난다.


"아~ 어쩌란 말이냐!!"




이러한 실정이지만 작년 초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인 김예지 의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복지콜은 한대도 증차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는 그들의 시위를 제지할 수 있을까. 더이상 그들에게 너무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시할 수 있는 효율적인 다른 대안은 있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내 가족이 저런 상황에
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어떻게 앞일을 자신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입으로 지은 죄를 갚기 위해
어떤 불편도 감수하고
형벌처럼 입을 다물 자신이 있는가.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나는 똑같이 불편을 호소하고, 도와달라고 알아달라고 소리낼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불편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우린 "몰라서 그랬어.", "몰랐지"라는 말을 자주한다.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세상을 '몰랐다'는 면죄부가 있기에 어쩌면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원샷한솔을 알고부터 나는 그를 부지런히 팔로워하고 있다. 몰라서 그랬다는 말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경청은 중요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한솔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내가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미처 몰랐던 이야기, 보이는 곳에 있지만 보지 못했던 세상의 이야기를 그는 다정하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는 동정심에 호소하지도, 연민을 자아내지도 않는다. 그는 알아달라고 하기 보다는, 밝고 명랑하게 그저 경쾌하게 보여준다.  


시각장애인이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오해(?)를 유쾌한 에피소드 형식으로 보여준다.  


시각장애인이 장애인 친구와 피자를 먹는 방법, ATM을 사용하는 방법, 초등학생 시각장애인을 만났을 때, 친구의 얼굴을 알아보는 방법 등 이런 이야기들은 비교적 '드라마'다.  


- 아, 이렇게 그들은 살고 있구나.

- 아, 이런 방식으로 소통하는구나.


영상을 보다보면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일들을 그와 그의 친구들이 겪고 음을 알게 되고 분노로 얼굴을 붉어지기도 한다.


가령 시각장애인들의 생명선과도 같은 도로 위의 "점자블럭이 보기 싫다"는 친구가 있다든지,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다가 직원에게 "사지 않을 거 만지지 말라"고 경찰에 신고를 당한 뒤 "오늘 제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라는 사과(?)를 들은 경험담이라든지, 한번도 겪으면 불쾌할 일들이 그에겐 일상이 되어 줄줄이 업로드되어 있다.  


댓글을 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피드에는 좋아요, 댓글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작은 의견 +1이 그의 활동에 힘이 될 것이라고, 그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소극적인 표현이나마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을 보면 시각장애인의 세상은 어둡지 않고, 오히려 낮도 밤도 환하다고 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인지, 어떠한 표현의 방식인지 알지 못한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아마 눈치를 보고 물어보지 못할 확률도 높다.  


한가지의 불편한 상황을 놓고 어떤 사람은 묻는게 예의가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알려고 하지 않는게 더 문제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CASE BY CASE.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일단은 열심히 듣고, 보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부지런히 듣고 싶다.  


세상은 우리와 비슷한 누군가, 또 너무 많이 다른 누군가가 이웃해 있고, 함께 살아가게 되어있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일은 끊임없는 관심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공감이 필요로 하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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