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4. 힘든 하루

여행이라고 항상 즐거운 건 아니야

by 모모


#20. 세번째 날 아침은 비가왔다.



숙소 앞 베란다를 나가 밖을 내다보니 도로가 촉촉히 젖어있다. 비가오는 차분한 느낌도 나쁘지 않다. 오늘은 가방을 사러 갈 예정이다. 교토의 루이비통(?) 이라 불린다는 "신자부로 한푸" 가 목적지였다. 교토에서만 판매하는 리미티드 에디션(?)인데다 백년이 넘은 유서깊은 브랜드라 무척 욕심이 났다.

사실 월요일에 이미 신자부로 한푸를 방문했었다. 뭘 살까 망설이는 나를 보며 점원은 수요일 오전에 가방이 새로 들어오니 오픈할 때 오라고 귀띔을 주었다. 오늘은 약속의 수요일 아침, 망설임 없이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이제는 숙소 근처 지리도 익숙하다. 최대한 동네 사람인척 우산을 들고 자박자박 버스를 타러 갔다.



뒷문으로 타고, 앞으로 내리는 버스에도 조금은 익숙해졌던 셋째날이었다.

#21. 신자부로에서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우선 오픈시간을 맞춰 간 덕분에 입장까지 잠시 기다렸고, 가방이 공장에서 옮겨져서 진열되는 때 까지 기다렸다(공장은 판매장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수요일 아침에 훨신 더 많은 가방이 들어오니 그때 오세요- 라고 했던 점원의 말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새롭게 들어온 가방의 종류는 적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가기에는 워싱된 부드러운 색감과, 십년을 들어도 거뜬할 것 같은 튼튼한 소재와 봉제가 마음에 든다. 그 와중에 일본인, 중국인, 수많은 손님들이 심상치 않은 기새로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심플한 모양의 회색 가방을 남자친구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얼른 집어들어 품고는 지나가는 직원분을 몇 번 붙잡고 갖고싶은 디자인을 손짓 발짓을 동원해 물으며 두 세번 다시 묻고, 약간의 기다림 끝에 그나마 마음에 드는 가방을 계산하고 인파를 헤쳐나올 수 있었다.

#22. 매장을 나설때는 가방하나 사겠다고 여행지에서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유난을 떤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 뒤로 가방을 쓰다보니 그런 마음은 잊혀졌다. 튼튼하고, 예쁘고, 적당했다. 맘에 드는 물건을 만났을 때 오는 기쁨이 있다. 누군가 교토에 간다면 신자부로에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단 언제 새 제품이 들어온다는 점원의 말은 그닥 신경쓰지 않기를 바라며.

#23. 내일이면 돌아가는 날. 점심때쯤 비행기라 사실상 세번째 날이 마지막으로 관광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아침 시간은 신자부로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소비했고 비는 그치지 않았다. 어딜갈까 고민하다 큰 맘 먹고 멀리까지 가버리려 올라탄 버스는 잘못 탄건지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동했다.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흐린 날씨도, 혼자서 모든걸 결정해야하는 상황도 모든게 맘에 들지 않았다. 마음의 짐도 있었다. 내일로 여행이 끝나 서울로 돌아가면 나를 기다리는건 익숙한 옛 직장이 아닌 모든게 새로운 새 직장이었다. 막연한 두려움. 실체를 모르는 것 만큼 두려운건 없다. 머릿속의 구름에 가려진채 그림자는 끝없이 길게 늘여저 머릿속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마치 지금의 불편함이 앞으로의 회사 생활을 예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땐 불안이 불안을 낳아 지금이 여행중이라는 것 조차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못난걸 알지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짜증을 부렸다.
- 오늘 하루종일 비와, 버스도 잘못탔어, 혼자 다니는거 외로워, 나 혼자 다 결정해야 하는거 싫어.. 같이 있으면 좋았을걸, 나 돌아가면 회사 옮겨가야해, 싫어. 무서워..

좋다고 교토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혼자서도 너무 즐겁다며 흥얼거릴때는 언제고 힘들어지니 금세 징징거리고 기대고 싶어한다. 어른스러운, 어른다운 사람이고 싶었지만 나는 아직 멀었다. 전화를 받아준 남자친구는 천천히 얘기를 들어주고 괜찮다며, 잘 될거라며 진정시켰다. 여행지도 사람 사는 곳이니 힘들때가 있지만 곧 다시 즐거운 시간이 다가올 것이고, 회사는 정 아니다싶을때 그만둘수도 있으니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고 했다. 내가 대책없이 사표를 던지거나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믿어주며 해주는 말이라는 걸 알고있다. 그는 천천히,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일단 타 보자고 했다. 달래주는 다정한 말에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곧 카라스마로 가는 버스가 다가왔다. 구석 자리에 올라타 자리를 잡고선 머리속을 정리했다. 그래. 어떻게든 될거야, 해낼 수 있을거야, 나를 믿어주자. 여행은 기왕 온거 조금만 더 힘내서 오늘 하루도 가능한 즐겁게 마무리해보자. 여행이라고 꼭 좋은일만 있는건 아니야. 무조건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야. 마냥 즐겁고 행복해던 시간이 있듯 잠시 혼란스러운 때도 있을 수 있는거야.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겠지. 익숙했던 직장을 떠나 새 직장에 적응하는건 어렵고, 힘들고, 실패할 수도 있다. 모든건 다 그마저의 의미가 있는 거겠지. 돈을 많이 번다고 성공도 아니고, 도전을 거듭한다고 해서 가치있는 인생인 것도 아니다. 내 삶이 얼마나 값진지 그에 만족하는건 아마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주변의 평가가 나를 오롯하게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다. 실패와 새로운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웠던 시간이었다. 귀국이 다가오며 불안감이 폭발했던 셋째날이었다. 사실 계속해서 두려웠다. 애써 눈을 돌려 다른 곳을 봤지만 결국은 마주하게 되었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해 이 곳으로 왔는지도 모른다.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셋째날은 이제와 글로 정리를 하다보니 가장 의미있던 하루였던 것 같다.

#24. 카라스마 거리로 돌아와서는 특별한 목적지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토야에서 문구류를 잔뜩 구경하고, 주변 사람들 선물도 구입하고. 시간도 생기고 특별한 타겟이 없다보니 예상보다 여유가 생겨 즐거워졌다.



갈까말까 고민했던 BAL라는 쇼핑몰에도 갔다. 전혀 갈 생각이 없었던 청담동이나 가로수길에도 하나 있음직한 쇼핑몰이었다. 막상 도착하니 기대보다 훨신 더 멋졌다. 볼거리도 가득했고 어디서 살지 찾고 있던 백팩도 하나 구입할 수 있었다. -흔해빠진 말을 계속 반복하는 듯해 민망하지만- 계획 없이 다니는 일정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직원에게 BAL 내부를 촬영해도 괜찮을지 동의를 구하고 사진에 담아보았다.



#25.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오코노미야키가 먹고싶다.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는 곳 앞에 오코노미야끼집이 있었다. 오코노미야키는 구워지는데 오래걸렸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외국인 손님이 한명 들어와 그 또한 혼자 바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저렇게나 외로워 보였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마주한 교토타워는 감격스러울 만치 아름다웠다. 비오던 거리에서 길을 잃고 해매던 때가 마치 어두운 미래를 점치듯 암울하게 느껴졌다면 교토타워의 반짝임이 다가올 반짝이는 미래의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나가는 모든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 너털웃음이 나왔다. 불안하긴 많이 불안한가보다. 현실은 영화같지 않아서 인생은 생각보다 나쁜일만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곤란한 일은 엉킨 운동화 끊을 풀듯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나가다 보면 생각보다 금방 해결되는 법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를 좀 더 믿고 응원해주겠노라 다짐했다, 붉게 빛나는 교토타워를 바라보며.



유난히도 길었던 셋째날이 끝났다.
끝날 것 같지 않던 혼자하는 여행도 끝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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