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보내며..
얼마 전 남편 회사 지인들과 가족 모임을 했다. 몇 번 만나 익숙한 분들이었지만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그중 한 분이 나를 가리키며 ‘제일 언니’라고 했다. 남편과 내가 동갑이다 보니 어딜 가도 이제 동생들이 많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나잇값을 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막내로 자라서 언니들이 편한데, 이제 언니를 하라고 한다. 부담스럽다. 20대 때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이가 그 사람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중에 나잇값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여겼다. 나잇값의 무게를 느끼는 시점이 이제 내게도 온 모양이다.
‘00학번입니다’를 외치며 캠퍼스를 누비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내가 태양을 마흔 바퀴나 돌았단다. 이제 또 한 바퀴의 완주가 얼마 남지 않았다. 차곡차곡 쌓인 나이는 나를 무겁게 만든다. ‘이 나이 먹고 이래도 되나?’ 라고 고민하게 만들고, 동생들 사이에서는 체면을 차려야 될 것만 같다. 나잇값이라는 무게와 아직도 철없는 나 사이의 갭이 서글프다.
대학교 1학년 때 4학년 선배들을 보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을 다 아는 것만 같고, 삶의 철학이 있는 것 같고, 근사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들도 20대 중반도 안된 청년들이었다. 장난치고, 뛰어다니고, 유치한 말장난이 어색하지 않은 청춘들.
나는 선배들을 동경하며 나이를 먹는 게 좋았다. 서른 즈음엔 직장도 있었고, 경제적 자립도 이루었고, 드디어 주체적으로 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는 청춘이 가는 것을 아쉬워했지만 나에게 서른은 청춘의 절정이었다. 60대면 인생 황금기이지 싶다. 같은 가수가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인생과의 작별을 말한다. 이제 이 노래들은 ‘예순 즈음에’, ‘어느 100세 노부부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흔 살이 되어도 담담했는데, 마흔한 살이 되려니 뭔가 서글프다. 한 살 차이인데 왜 그럴까. ‘이 나이쯤이면 이미 자리를 잡았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애써 쌓아온 내 커리어가 허무하기도 하다. 하던 일하고 살면 되지 뭘 그리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 커리어를 포기하는 건지 답답하기도 하다. 한편으로 평생직장의 개념은 없어지고, 일생 동안 몇 번씩 직업을 바꾼다는 기사들이 그나마 나를 위로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연기적 탄생’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나의 행동이 미래 어느 시점의 결과까지 동시에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과거 내가 한 행동이 지금의 나를 탄생시켰다. 지금 나의 행동 또한 미래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내 나이와 내 시간과 손잡고, 그 결과물을 만나러 가야지’, ‘뭐가 돼도 되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나잇값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대학 신입생 때 선배들을 바라보던 그 시선으로 40대를 바라본 듯하다. 삶의 철학과 직장에서의 안정된 자리와 무게 있는 중후함까지 기대했었나 보다. 적고 보니 뭔가 딱딱하고 건조해 보인다. 내가 설정한 ‘나잇값’에서 무게를 조금 덜어 내야겠다. 나이를 알고 살아야 하지만, 나이에 갇혀서 살지는 말아야겠다. 오늘도 나는 9살이 되어 딸과 싸우고, 코믹 댄스를 추고, 밥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린다. ‘나만 이런가’ 생각하다가도 ‘나도 그래’라는 친구들의 말에 위안을 느낀다. 나는 나답게 철없음을 즐기려 한다. 마흔하나라는 나잇값은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모습이 만들어주겠지. 꿋꿋이. 최선을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