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들
24.04.29 월
오늘은 놀랍게도 건축학과 입학 후 800일 차인 동시에 3학년 중간 크리틱 날이기도 했다. 나는 3일 밤을 꼴딱 새웠다. 평소에 아예 안 하는 건 아닌데 늘 그러하듯 막판에 밤을 새우게 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손이 매우 느린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히 제때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머리가 지끈지끈… 너무 아프다. 입은 바짝 마르고 입맛도 사라진다. 어딘지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물속에 잠긴 듯 멍하기도 하다. 사실 나는 취할 때 글을 더 편하게 쓰는 편이라, 이번엔 피곤에 취했으니 글을 쓰고 싶었다. 눈이 자꾸 감겨서 힘들다. 눈꺼풀에 바위를 얹은 기분이 이런 건가..?
마지막 문장을 쓰자마자 버스에서 쓰러져 잤다. 눈을 뜨니 30분 거리를 몇 초 만에 도착해 있더라. 아무튼. 3학년 1학기 중간 크리틱날이자, 건축학과 입학 800일 차를 기념하여 나는 건축에 대해 또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었나 기록해두고 싶었다.
이 일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마음은 아마 올해 처음 들었던 것 같다. 동시에 이 일을 내가 진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의문도 올해 처음 들었다.
……. 진짜 내 마음은 뭘까?
학기 초반에는 칭찬 감옥 속에서 오랜만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나 이거 계속해도 될 것 같은데~?’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지금 약간 풀어지려던 참이라 쓰면서 반성 중). 디자인은 논리가 아니라 직관이라는 말을 하시던 교수님을 보고 세상에~ 드디어 나랑 의견이 맞는 교수님을 만났군 싶었다. 다행히도 사고방식이 맞으니 매번 납득 가능한 크리틱을 받게 되어 피드백받는 맛이 있었다. 차근차근 스텝을 밟아가는 듯한 피드백. 이거거든~!
그리고 이번 스튜디오 동료들은 아무것도 안 해왔다면서도 매번 교수님 앞에 출장뷔페를 차려놓았다. 노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열심히 한다는 뜻이다.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성격들이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데다가 좀 신박한 발표를 하게 되면 교수님이랑 스튜랑 리액션을 너무 잘해줘서… 발표 공포증을 치료받는 중이다. 반응이 뜸하면 ‘아 오늘 발표는 좀 재미없을만했지’라며 인정도 하고, 이래나 저래나 원동력이 된다.
경청과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게 발표에서 가장 나를 당황스럽게 하던 순간들인데(특히 중크나 기크 중 교수님들이 손바닥으로 얼굴 다 가리고 문질문질 하시거나 정말 따분한 표정을 하고 계실 때… 무표정보다 더 무서웠다) 이젠 그것도 좀 배짱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지루하시다면 제가 더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보지요! 싶어서 더 눈 마주치려 하고, 나름 발버둥 치고 있다. 이건 나중에 발표 이야기로 더 써보겠다.
모든 일에는 어느 정도의 재능이 필요하지만 예술은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건축학과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공대 소속인데 아무래도 공학보다는 예술에 훨씬 더 가깝다고 이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외국에서는 대부분 미대 소속이던데, 내 생각엔 이게 맞는 것 같다.
건축을 배운 지 2년하고 몇 개월이 지나고 나니 설계 작품을 보고 ‘와 진짜 잘했는데~?’ 혹은 ‘이건 이 부분이 좀 아쉽다...’가 단숨에 나오는 정도의 안목은 생겼다. 난 이 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보는 게, 어떤 일에 대한 내 주관이 생겼다는 건 그 일을 알고 이해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약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분명 조금만 더 고민하면 떠올릴 수 있던, 조금만 더 자리에 앉아 만들어보면 생각할 수 있던 것들을 몽땅 놓친 기분이다. 다른 학생들의 작품을 보고 ‘아차 저거!’를 연달아 외치는 게 크리틱인 것 같다. 그리고 그 횟수가 늘어나면서 졸업을 향해 가는 거다. 내 것만 보고 있으면 떠오르지 않던 게 다른 이들의 것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게 좀 신기하다.
다른 설계작들을 쭉 살펴보면 유독 눈에 띄는 작품들이 있다. 보통 그런 친구들은 ‘건축적 머리’가 뛰어난 거라고 생각한다. 예술성, 창의성, 기발함 등은 훈련을 통해 기르는 데 한계가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나는 며칠을 싸매고 생각해도 떠올릴까 말까 한 것들을 자연스레 떠올리는 사람을 보면 결국 재능이려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내가 떠올린 멋진 것들은 대부분 우연에 기반을 둬서인지 스스로 ‘나 좀 하는데?!’ 싶은 생각이 든 적은 거의 없다.
다만 요즘은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서인지, 자극이 되는 사건들이 많아서인지… 애매한 재능일지라도 포기하고 싶진 않아 졌다. 일을 하는 내 능력이 좀 모자라고 초라해 보일 때면 나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스스로 기특하다고 여기자는 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되기도 했다. 이건 평소 음악 작업량이 어마어마하다고 알려진 잔나비 최정훈 님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라왔던 내용인데, 마음에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터라 아래 사진으로 공유해 본다. 힘든 본인의 모습도 소중히 아껴주는 조용한 자기애, 자포자기 않고 풀어내려고 애쓰는 모든 작은 일들이 진정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크리틱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이걸 진작에 했어야 되는데‘ 싶은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보인다. 어딜 숨어있다가 우르르 나타나는지… 아니 내가 여유 있을 땐 그것들을 보고도 무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막판에 몰아쳐서 하고, 시간에 쫓기고, 기절할 것 같고 그러지.
사실 표준 작업 방식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가뜩이나 느려터졌는데, 모형이든 프로그램이든 간에 여러 번 했던 일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억을 못 해서 초기 설정을 매번 다시 한 뒤 일을 시작했다. 겨울방학 때 이러한 체계에 대한 틀을 미리 잡아놨더라면 막판에 하루에 해 뜨는 걸 2번이나 지켜보며 피로에 찌드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작업 방식에 일정한 규격을 만들면 틀에 갇혀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초심자의 입장에서 이런 규격은 시작을 쉽게 하고, 어느 정도의 울타리를 세워준다. 나는 그 안에서 뛰어놀면 되는 거다. 오히려 이런 방식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뜨겁게 데어보니 별 걸 다 깨닫는다. 부디 기말 크리틱 때는 여유롭게 결승선에 뛰어들고 싶다. 이제는 간절한 수준이다. 너무 힘들었다.
학기가 끝날 때쯤 늘 나를 가장 괴롭혔던 건 많은 과제로 인한 부담감,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감도 아닌 ‘허무함’이었다.
한 학기의 수고가 몇 장의 도면, 패널, 모형으로만 남게 되면 결과는 보여도 과정은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은 작년 말 설계 과정 주간 보고서 한 학기 치를 몰아 쓰며 느낀 후회였다. 이유는 명확했다. 과정 기록을 하지 않았고, 설계를 매 수업마다 벼락치기하듯 준비했으니 배움이 누적될 수가 없었다. 매번 하루만큼 성장하고, 깨달음은 순간일 뿐 뒤돌아서면 다 잊고 하루만큼 뒤로. 결국 제자리였다. 종강 날 나는 한 학기가 아니라 딱 하루만큼 자라난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늘 학기를 찜찜하게 마무리했다.
올 초 겨울방학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기록 수단을 찾다가 노션을 배웠다. 사람들이 많이 쓰는 데는 무조건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확했다. 간단한 사용법만 알아도 나만의 홈페이지 하나가 생겨버리는데, 보기도 좋고 기록하기도 편했다. 1학년 때부터 썼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크다.
사실 초반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나는 ‘어설프게 할 바엔 아예 안 한다’는 못난 버릇이 있다. 초반엔 매일 열심히 과제하는 나로만 내용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이 드는 거다. 그래서 애초에 목표를 낮게 잡았다.
“일을 했든 안 했든 하루에 한 줄만이라도 쓰자.”
그래서 그냥 설계 안 한 날은 ‘오늘은 피곤해서 안 함’ 이렇게 적어뒀다.
나는 내가 어디쯤 왔는가를 자꾸 뒤돌아보는 습관도 있다. 그래서 내가 발전하고 있다는 과정이 눈에 보이는 어떠한 형태로 손에 잡히지 않으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아 불안했다. 기록함으로써 내 지난날들을 쉽게 돌아보며 무력감을 털어내고, 앞으로의 방향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니까 하는 거’라는 생각에 반항하며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던 내게 큰 변화를 준 게 이 기록들이다. 개인적인 감정 일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라 글 분위기도 새롭다. 이제는 안 쓸 수가 없다.
이 일은 더 재밌어질까? 아닐까?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발걸음은 좋은 쪽으로 향하는 중이다. 노션에 써둔 작은 일기로 오늘의 글을 마무리 지어본다.
오늘은 뭔가 건축이 좀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제 몫을 다하고 성실히 할 줄 아는 사람은 이제 내 사랑의 기준이다. 그래서 나도 이 분야에서만큼은 나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보려고… 매번 변덕스럽고 확신을 가질 수 없고 때로는 징그럽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건 건축이고. 과 옮길래? 뭐로?라고 물어봤을 때 나는 답을 할 수 없고. 적어도 순간순간 내 눈이 반짝이고 있구나, 하는 순간을 얼핏 느끼는 것도 건축이니까. 아 근데 시공현장은 진짜 재밌는 것 같아. ㅋㅋ.. 아무튼. 그냥 오늘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무력해진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 교수님과 스튜 식구들에게 왠지 쫌 고마워서 글을 쓰고 싶었다.
4월 12일 일기 - 시공현장 답사를 다녀온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