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생활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한 곳을 뽑으라면,
같은 자리에서 나를 항상 지켜봐 준 V&A Cast court에게.
넌 나에게 비밀의 열쇠 같은 존재였어. 감정의 분출구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곁을 내어주는. 갖고 있는 현금이 없고 딱히 할 일이 없어도 익숙한 문으로 들어가 익숙한 통로를 지나면 있는 너. 그렇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만이 갖고 있는 약속장소. 어떻게 박물관이, 그것도 한 전시공간이 이렇게 나도 오래 지켜본 친구 같은지 사람들은 묻지만 그만큼 너는 나에게 힘든 순간을 함께 해주었기 때문일 거야.
9년 전 내가 패션 학교를 다녀보겠다고 영국에 처음 온날 기억나? 난 사실 너의 존재도 몰랐어. 영국 하면 유명한 게 뭐가 있으려나.. 피시 앤 칩스, 대영박물관, 해리포터가 생각나는 이층 버스, 멋지게 기른 수염이 있는 교관들. 하지만 살다 보니 점점 여행을 할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영국의 어마무시한 물가와 생활은 나에게 넘어설 수 없는 굳은 벽 같았지. 그런 나에게 들려온 달콤한 소식은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박물관과 미술관이 무료라는 것. 돈 없는 학생인 나에게는 이 메리트가 누가 주어준 기회인 것 마냥 소중했어. 그때부터야. 매주 학교 과제를 마치고 내가 찾아간 곳은, 아이리시 펍도 아닌 학교 파티도 아닌 바로 너였다는 것.
그날도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었어. 네가 전시하는 그림 한올도 놓치기 싫어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야. 거대한 모조품이 서 있는 말 그대로 거대한 공간 두 곳. 신기하게도 왼편과 오른편이 같지만 다른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왼편의 모조품들이 더욱 끌렸어. 무언가 어둠의 사제가 만든 공간 같았거든. 아무리 모조품임에도 이 정도 사이즈를 옮기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하며 홀린 듯이 보다가 마련된 의자에 털썩 앉았어. 고요함만이 내 주변을 맴돌았지. 당시 가장 힘든 건 나에게 영국 워킹 비자가 없다는 사실이었어. 주변 유럽인 친구들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자유롭게 인턴을 하는 와중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괴로웠지. 이렇게 시간을 죽여도 될까. 나만 학생인 채로 흘러가도 될까.
당연하지. 지금 그렇게 있어도 괜찮아. 언젠가 너도 빛을 볼 거야. 네가 나에게 해준 말들.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쳐다만 보았는데도 왜 공간일 뿐인 네가 타지인인 나에게 위로를 해주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시간이 참 많이 흐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 다시 영국을 갔을 때, 나는 어김없이 또 너를 찾았지. 무모하게 사람 하나만 믿고 덜컥 여길 오다니. 나도 참 바보 같지. 잘 될 줄 알았는데 잘 안 됐어. 심하게 혼자 아파하다가 또 너를 만난 거야. 잘 안 됐니? 저런. 이 공간에서만큼은 한없이 슬퍼하고 한없이 울다 가렴. 너의 삼삼한 위로 덕에 나는 끝끝내 그 관계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어.
작년 12월에는 내가 이런 영국에서 상을 받으러 갔었지. 영국 패션 협회에서 진행한 50인의 크리에이티브 인물에 내가 뽑힌 거야. 정확히는 우리 스타일리스트 팀이 뽑혀서 공동대표인 나도 같이 가게 된 거지. 나는 지금까지의 내 노력이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 같아서 기뻤어.
과거에 영국에서 학생과 타지인으로 힘들었던 내가 한꺼번에 위로받는 순간 같아서 더욱 기뻤지. 이날은 처음으로 내가 연인으로 칭하고 싶은 사람과 너를 보러 갔어. 벤치에 딱 앉자마자 너는 위아래로 한번 흘겨 훑더니. 행복하니? 행복하면 되었다.라고 말했지. 봤어? 나도 기분 좋은 순간에 너를 보러 가긴 한다고.
그러게 말이야. 너 말대로 나도 빛을 보긴 하네. 그때 조급했던 나와, 어설픈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던 나. 그리고 무언가를 이룬 작년 12월의 나 모두 너에게는 같은 선상의 일이겠지? 고마워. 그때의 나에게 미소를 짓고, 말없이 보듬어주고, 미래를 약속해 줘서. 나는 너를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갈 거야.
다시 찾아갔는데 네가 어느 순간 공사를 하고 있거나 없어지면 크게 슬퍼하고 상심하겠지만, 과거를 아끼는 영국인의 마인드로 빗대어 보았을 때 약 수십 년간 너는 사라지지 않을게 분명해.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내 과거를 잘 보존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