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레바논 아이스크림이 되고 싶다.
비행 시간 경유 포함 총 32시간. 예기치 못한 숫자였다. 이번 파리 패션위크 출장에 두명분이라는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고 싶어 경유라는 옵션을 택했다. 그러나 이름과 성을 바꿔 예약한 나의 실수로 인해, 같이 갈 예정이었던 직원분은 가지 못하게 되었다. 혼자 일본에서 총 6시간의 기다림 후 11시간 비행을 하여 도착한 아부다비. 그곳에서 또 3시간을 기다린 뒤 10시간 비행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프랑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힘든 건 그 후 내게 울린 이메일 알림들이었다.
시즌 첫 날부터 항상 가던 브랜드 쇼들에게 거절 멘트를 줄줄이 받은 것.
몇 년 동안 같은 파리 패션 위크를 연달아 갔지만 이번 시즌은 제일 저조한 회신률을 보이기도 했다.
왜일까. 이 정도 하면 진짜 오래 열심히 해온 것 같은데. 마레 지구 한복판에 내 얼굴도 있는데! 얼어붙은 유럽 패션 세상이 나를 알기엔 아직도인 걸까. 영양가 없는 생각들이 팝업창처럼 떠올랐다.
마치 전쟁터에 싸울 태세를 모두 갖춘 군인인데 어렵게 도착해 보니 현장에서 전쟁이 갓 취소되었다는 걸 들은 기분이었다. 아쉬움과 동시에 마음 한켠이 괴로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러다 이자벨 마랑 쇼 날이었다. (다행히 마랑은 날 취소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쇼 전 시간 마레 지구 커리집 야외에 앉아 식사를 하려는데, 현지 직원이 날 보곤 웃으면서 이러는 거다. "You are Cheri right? I love your work so much. Keep up what you are doing." 이 랜덤한 직원분이 날 안다고? 바람만 불던 마음 한켠에 휴대용 난로가 급히 자리를 치우며 들어왔다. 난데없는 인류애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파리 패션위크 마지막 날에 또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핸드폰 충전을 하기 위해 마레의 한 아이스크림 샵 Baltis 에 들린것. 나보고 한국 아이돌이냐고 묻는 친근한 레바논 사장님에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던 중, 갑자기 사장님이 아이스크림을 한 번 먹어보라고 스푼을 내미는 게 아닌가. 달달하고도 쫀득한 레바논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무니 온갖 생각들이 정리되고 마음이 가득 찬 기분이었다. 이런 맛은 처음인데? 놀란 내 표정을 보더니 신이 난 사장님은 온갖 맛을 테이스팅해 보라고 스푼을 건네기에 이르렀다. 가기 전에 먹으라고 공짜 쿠키도 쥐어주기 까지.
외로움을 갑자기 입에 문 아이스크림처럼 한순간에 해결할 수만 있다면.
또는 매 순간 힘들 때마다 "나 너 알아. 잘 보고 있어. 계속 꾸준히 나아가 줘,"라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괴롭지 않을 텐데.
수많은 크리에이터 혹은 카메라 앞 보여지는 삶에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어쩌면 힘든 사람 하나 살리는데에는 많은 돈이나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말 한마디, 달콤한 아이스크림 한 입이면 되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