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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 Oct 12. 2022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좋은 것들

Letters from Thailand (1) 


밤 12시. 방콕 수안나품 공항에 내렸다. 


낯선 타국에 있음을 실감 나게 한 건 비행기에 처음 내렸을 때 느낀 공기였다. 공기의 온도, 질감, 냄새가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는 모습이라 낯설고도 신기했다. 태국은 처음이었고, 해외여행은 3년 만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낯선 공기와 읽을 수 없는 글자들 사이에서 짐을 찾았다. 지금은 눈을 감아도 그려질 만큼 익숙해진 공항이 세상에서 가장 낯선 공간이었던 그 밤, 우리는 가장 먼저 KFC로 갔다. 낯선 공간에서 익숙한 것들을 찾으면 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KFC, 로손, 맥도널드, 스타벅스 같은 익숙한 브랜드가 늦은 밤 낯선 땅에 내린 우리를 반겨주었다. KFC에서는 처음 보는 치킨 덮밥과 익숙한 치킨랩을 골랐다. 서울의 한 카페에 앉아 치킨 덮밥을 떠올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맛이 혀 끝에 전해지는 것 같다. 향신료로 간을 한 듯한 톡-쏘는 음식이었다. 내 세계에서 익숙하지 않았던 것들이 당연한 새로운 세계로 왔구나. 여행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적당히 배를 채운 우리는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방콕의 호텔이 아닌 '돈므앙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치앙마이로 가는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서 노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항 노숙이라니.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선택. 대학생 때도 해본 적이 없는 고된 여정을 우리는 '굳이' 선택했다. 친구와 이번 태국여행을 준비하면서 항공편에 드는 돈을 최대한 아끼자고 했다. 이런 식으로 돈을 아끼는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하는데, 몇만 원 아꼈다는 사실보다는 그렇게 하는 여행이 은근히 재밌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안나품 공항에 도착한 순간 그 선택을 조금 후회했다. 비행기에 앉기만 하면 잠드는 내가 이번에는 6시간의 비행 동안 거의 자지 못했다. 너무 피곤했는데 따뜻한 물로 씻을 수도, 폭신한 침대에 누울 수도 없다니. 그런 마음은 접어두고 일단 택시를 탔다. 방콕의 택시 기사님은 700밧을 불렀다. 늦은 새벽이고 하이웨이를 타야 하니까 700에 가자고 했다. 사실 블로그 후기에서 며칠 전에 500밧으로 돈므앙 공항까지 갔다는 후기를 읽었는데.. 흥정할 힘도 없어서 그냥 그러자고 했다. 


돈므앙 공항은 수안나품 공항보다 작았지만 역시나 깨끗했다. 늦은 밤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블로그 후기를 찾아 적당히 시간을 보낼만한 곳을 찾았다. 낯설고 불 꺼진 식당들 사이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맥도널드가 눈에 보였다. 캐리어를 끌고 맥도널드로 갔다. 몇몇 여행객이 유튜브를 보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앉아있었다. 우리는 구석진 소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너무 피곤해서 소파에 누웠다. 옆에 친구가 있으니 무섭진 않았다. 눈을 붙여보려 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 공항이 너무 추웠다. 더운 나라 태국의 실내는 에어컨 덕분에 춥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더 두꺼운 옷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뜬 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가까운 곳에 앉은 독일 남자가 통화하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누워서 생각했다. '이 순간도 그리워할 날이 올까?'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비행기 탈 시간이 가까워졌다. 우리 둘은 소파에 앉아 우리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했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순간이 '그리워지진' 않아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는 점에 둘 다 동의했다. 몸은 너무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그냥 다 웃겼다. 새벽 4시에 돈므앙 공항 맥도널드에 있는 우리. 친구는 나름 똑소리 난다는 우리가 이런 선택을 했다는 점이 제일 웃기다고 했다. 그래도 후회나 불평보다는 웃어넘길 수 있는 우리라서 좋았다. 다시는 이런 선택을 하지 않겠지만, 이 순간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내 입꼬리가 내려오질 않는 걸 보니 좋은 추억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밖엔 세차게 비가 내린다. 10월은 태국의 우기라고 했다. 여름의 쨍한 햇살이 좋아서 가을을 피해 온 태국인데 우기라 밖은 쌀쌀하고 우중충했다. 그랩 택시를 타고 에어비앤비 앞에 내렸다. 정확히는 에어비앤비와 가까운 큰 호스텔 앞에 내렸다. 이제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야 한다. 비는 내리고 이른 아침이라 다니는 사람들은 없는데 지도를 찾아 따라가 봐도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고 있을 때 한 아주머니가 와서 어디를 찾는지 물어보신다. 에어비앤비에 적힌 '메이플'이라는 이름을 이야기했더니 따라오라고 하셨다. 드디어 찾았다-! 나의 모든 여행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고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민 사람들이 있었다. 어딜 가든 그랬다. 나는 서울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인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도움을 요청받기 전에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짐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러고 싶다.


이번 여행에서 또 한 번 정말 감사했던 것은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슈퍼 얼리 체크인을 너그러이 용납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치앙마이에 오전에 도착했다. 9시도 되기 전이었다. 그런데도 호스트는 짐을 맡아줄 뿐 아니라 그때부터 숙소를 쓸 수 있게 내어주었다. 이전에 머문 손님이 없어서 가능하기도 했겠지만, 이런 넉넉한 마음에 감사했다. 우리의 에어비앤비는 우리가 '치앙마이'를 떠올릴 때 떠오르는 이미지 그 자체였다. 깔끔하고 감각적인 가구와 인테리어, 넓은 창으로 보이는 그리너리. 여유로운 초록빛과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디자인의 조화. 숙소에 도착한 순간 피로가 사르르 풀리는 듯했다. 따뜻한 물로 피로를 씻고 나왔다. 친구가 가져온 보이차를 숙소에 있는 예쁜 찻잔에 내려 마셨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좋았다. 오히려 더 좋았다. 내가 지난 태국 여행을 떠올리면 가장 좋았던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밤을 꼬박 새더라도, 바보 같은 선택을 해서 후회될 때에도, 호우주의보로 비가 아무리 세차게 내려도, 그런 상황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좋은’ 것들을 찾아내는 것. 우리는 ‘억지로’ 좋은 점을 찾아내려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든 것이 좋았다. 너무너무 좋아서 좋다는 말을 끊임없이 해댔다.


이런 내 모습을 유난스럽게 보지 않고 똑같이 너무 좋다고 하는 친구랑 여행할 수 있어 좋았다. 사소한 것에 즐거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하는 내 모습,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내 모습이 유독 빛을 내는 순간이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 마음 같아선 침대에 계속 누워있고 싶었다. 숙소도 너무 좋은데 창밖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래도 여행 첫날인데. 그래서 밖으로 나갔다. 치앙마이에서 첫 마사지를 받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마사지 샵에서 전신 마사지와 아로마 오일 테라피, 핫 스톤 마사지를 패키지로 받았다. 거짓말처럼 밤새 쌓인 피로가 녹아 사라진 것 같았다. 맑게 개인 하늘과 뽀송해진 거리와 햇살 틈새로 치앙마이의 갤러리와 카페를 구경했다. 낯선 도시지만 마음이 차분해지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치앙마이는 첫인상부터 참 좋았다. 


그날 밤 내가 쓴 일기를 끝으로 첫번째 Letters from Thailand를 마친다.  



2022.10.01


경비를 아끼려고 밤 비행기와 노숙을 선택했던 우리. 아이러니하게도 택시비는 흥정하지 않았던 우리. 돈므앙 국제공항 맥도널드에서의 노숙. 바보 같지만 인생에서 꽤나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될 것 같다. ENFJ*는 좌절하지 않지 우리는 늘 좋은 의미를 찾지. (*친구와 나 둘다 ENFJ라 ENFJ티셔츠를 잠옷으로 입고 잤다ㅎㅎ)


밤 꼴딱 새고 도착한 치앙마이 숙소에서 뽀송하게 씻고 비를 바라보며 보이차 마실 때 정말 행복했다. 갑자기 개인 하늘과 뽀송해진 거리, 햇살, 타이 마사지. 온몸의 피로가 다 녹는 것 같았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도 좋았다. 재밌었다.


내일도 기대된다.

인생은 선택이다. 내 마음은 늘 선택이다. 환경이, 상황이 내 인생과 내 마음을 좌우할 수 없다. 나는 항상 좋은 길을 찾아낼 거고 좋은 길을 선택할 거야. 처음 방콕 수안나품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공기, 냄새. 낯선 그 공기와 냄새가 서서히 익숙해져 간다. 이곳에서 접하는 향신료들도, 새로운 시도들도 모두 좋다. 내일은 더 좋은 하루가 될 거야.




이 일기는 치앙마이를 여행하던 나의 오늘과 내일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인생도 늘 이런 마음으로 살고 싶다. 


'오늘 정말 좋았어. 내일이 기대돼. 내일은 더 좋은 하루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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