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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epina Oct 25. 2019

자니? 응. 잔다.

찌질함 반품하고 솔직함 살게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자니?' '뭐해?'가 제철인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지질하다 : (속되게)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
-네이버 국어사전-
*지질하다가 맞는 표현이지만 느낌이 살지 않아 찌질하다로 쓰겠습니다. 이것도 곧 짜장면처럼 변경되지 않을까요??*

 인간관계에서 두루두루 자주 쓰이는 말인데 특히 이성관계에서 더 유용히(?)쓰이는 것 같다. 그 관계에서 쓰이는 '찌질함'에 대해 말해본다. 내 성별에 맞춰 여자 입장에서.

 흔히 두 유형의 사람에게 사용되는 말인 것 같다.


자신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허세 또는 허영으로 과장되게 표현하며 거절에도 비논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는 자아성찰이 없는 정신승리형. 

   사례를 들어본다.

1. 10년 정도 전의 일이다.

 너무 오래전이라 정확한 상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도 술자리 같은 자연스러운 자리에서 번호교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는 한 남성에게서 무차별 문자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일어났니?' '점심은 먹었고?' '오늘 날씨가 좋네.'  '좋은 꿈 꿔'

 한 번도 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일방적으로, 그러나 마치 날 여자 친구 다루듯이 혼자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지금 쓰고 보니 좀 무섭.. 그리고 넌 왜 나한테 반말?)

 스마트폰이 있기 전이니까 스팸 처리하면 될 일이었는데 계속 무시하던 나는 며칠이 지나 기어코 한 마디를 하고 만다.(불쾌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겐 그 행동이 상대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사실을 꼭 알려야 하는 피곤한 성질머리.. 다행인 건 요즘은 귀찮아서 그냥 차단..)

 '죄송한데, 문자 보내지 말아 주실래요?'

 '왜?'

 왜라는 짧은 한마디에서 날 여자 친구 보살피듯 하던 그의 태도가 돌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한마디엔 너 따위가 뭐라고 나한테 이런 말을 해? 니가 뭐가 그렇게 잘나서 날 무시해? 등등의 온갖 화와 짜증이 담겨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니 열등감 심한 유형의 사람이었던 듯)

 '싫으니까요.'

나는 담백하게 답을 했다. 몹시 화가 난 듯한 그의 답장이 왔다.

 'OOO(우리 동네 이름) 삶면 다 너처럼 싸가지 없어?'('살'을 '삶'으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오타라고 믿고는 싶지만 평소 그의 맞춤법 행태를 지켜본바 진짜 저렇게 알고 썼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왜 갑자기 난데없는 동네 공격? 놀라운 논리 좀 보소.)

 나는 간단히 답을 보냈다.

 'ㅇ ㅇ'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ㅋㅋ 그렇게까지 할거 있었나 싶지만 함무라비 법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유치함엔 유치함으로, 허세엔 허세로, 무례함에는 무례함으로 대응하는 평소 생활습관을 버릴 수 없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이 일을 아는 지인은 아직도 연락할 때 내가 조금이라도 단호하게 말하면 'OOO 삶아서(반드시 '삶'이라고 써줘야 제맛) 싸가지 없네?'라고 하기도 하고 나 또한 '야, 까불지 말래. 나 OOO 삶는 싸가지 없는 여자거든'이라고 말해서 웃곤 하다. 지금까지 웃게 만든 에피소드를 만들어준 그지만 어쨌든 찌질했다.


2. 작년인지 올해인지는 좀 헷갈리는 일이다.

 약속시간에 늦는 친구를 기다리며 지하철 역사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꽤 교양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거의 지하철 타고 다닐 때만 책을 읽어서...)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저기,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요..."

 "네?"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몇 살이세요?"

 "아... 저 나이 많은데요."

 "저도 많아요. 번호 좀.."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번호는... 죄송합니다."

 꾸벅 목례를 하고 나는 책에 다시 고개를 쳐 박았다. 그런데 그는 가지 않고 내 옆에 계속 서 있었다.

 "연락하면서 알아가면 되잖아요.. 번호만 주시면 안 될까요?"

  나로서는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번호.. 안될까요...?"

그렇게 몇 번 더 번호 얘기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그는 자리를 뜨면서 내게 한 마디 했다.

 "저도 나이 많아요. 곧 마흔이에요. 그쪽도 비슷하시죠?"

 응????? 이 ㅅㄲ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함?????

 친구를 만나 방금 전 얘기를 쏟아냈다.

 "..... 그러는 거야. 근데 있잖아. 나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어려 보인다고 말해주는 걸 진짜로 잘못 믿고 살아온 거 아닐까? 사실은 더 들어 보이는 거 아니야??"

 친구는 피식 웃더니 말도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애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니가 안 받아주니까 자존심 상해서. 그렇게라도 말해서 자기 자존심 회복하려고 하는 거지. 그리고 니가 진짜 그 나이로 보였으면 그 남자가 말을 걸었겠냐?"

 "그..릉가...?"

 좀 찝찝하지만(9명의 선플보다 1명의 악플에 신경 쓰는 타입) 나야 풀 메이크업, 풀 의상(?), 힐을 신고 번화가에 나갔을 때 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고 친구는 길거리 헌팅을 일상처럼 당하는 이쪽 방면(?)의 고수니까 그녀 말을 믿어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그 남자도 찌질한 거 맞다.


(상대의 마음과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직진 스타일

 KBS 일일 드라마가 오늘 끝났다. 드라마를 끊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정주행 하지 않더라도 스토리라인 정도는 알고 오다가다 보는 드라마가 일 년에 한 두 개가 꼭 있던데 이 드라마가 그랬다. SBS 8시 뉴스 날씨까지 보고 돌리면 딱 10분 정도 볼 수 있는데 매일 10분씩 보다 보면 자연스레 전개를 따라가며 볼 수 있었다. 모르는 건 엄마한테 질문도 해가면서.(엄마는 모르는 게 없다. 그 많은 드라마에 질문을 하면 다 받아친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매일매일 다시 보기를 하는 수고로움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주인공의 친구와 바람 펴서 이혼한 전남편이 주인공에게 다시 매달린다. 주인공에게 생긴 새로운 남자를 질투하며 자격도 없으면서 주인공의 행동을 따져 묻고 참견을 일삼다가 결국 이혼하고 다시 돌아갈 테니 받아달라고 얘기한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서는 주인공에게

 "내가 얼마나 절박하면 이러겠니. 얼마나 후회되면 이러겠어" 라며 무시하고 가버리는 주인공 뒤통수에 대고

 "절대로 너 포기 안 해!" 소리를 지른다.

 근데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그 장면에서 '와 씨! 겁내 솔직하네' 란 말이 튀어나왔다.

 보통 저런 유형의 캐릭터는 천하의 나쁜 놈, 죽일 놈, 뻔뻔스러운 놈! 욕하면서 보게 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저 드라마의 전남편은 이혼 후부터 연민과 측은함, 미움의 양가감정을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다. 그게 일부러 그런 캐릭터로 쓴 작가의 의도인지 배우의 연기인지(아... 두 개 다 같은 말이구나 ㅋㅋ) 아니면 극악무도하게 바람을 피울 때의 상황에는 내가 드라마를 안 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장면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내가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개인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이성의 악덕(?)의 요소 중에서 도박, 폭력을 제치고 늘 압도적으로 1위 자리에 바람을 꼽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솔직함이고 어디서부터 찌질함일까? 뻔뻔한 거 안다고 인정하면서 말하는 그의 행동이 찌질함이 아니고 어찌 됐건 솔직한 거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비록 KBS TV 클립도 그를 찌질하다고 묘사했지만)

 결국 그날 밤  꿈에 저 장면이 무한 재생되었다. 더불어 구썸남까지 꿈에 나와 두 씬이 끊임없이 교차 편집되며 밤새 나를 괴롭혔다. 일어났으나 몹시 피곤했고 잠을 잤으나 잔 것이 아니었다. (드라마를 끊은 네 번째 이유 : 꼭꼭 봉인해둔 기억과 생각의 상자를 마구 풀어헤침) 마카오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못 자고 온 당일이었는데 이틀 연달아 잠을 못 자면서 결국 며칠 고생을 했다. 

 찌질함과 솔직함은 한 끗 차이다. 상대방과 내가 유의미한 관계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과거에는 의미가 있었나. 상대는 그것을 싫어하나. 상관하지 않는가 등등의 여러 요소들이 복잡하게 영향을 끼친다.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상대방이 원치 않는다면 스토커가 되고 그게 아니라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스토커가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솔직하기란 (때론 찌질하다는 말까지 들어가며) 사실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내가 그 드라마 장면에서 놀랐던 것도 아마 그 이유였지 싶다. 아무리 자기 잘못이 깊어도 그걸 모두 까내보이고(!) 지금 감정에 솔직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게다가 받아주지 않을 것도 아는데. 바람나서 새로 한 이 결혼을 잘 유지만 하면 병원도 물려받을 수 있는데.

 생각해보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심쿵' 한다는 장면들도 솔직한 감정표현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말이든 행동이든. 유치하다고 하면서 보는 이유도 결국 진실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실제 생활에서는 다들 못 그러니까.  20대 초반에나 솔직하고 투명하게 표현했으려나? 보기엔 쉽지만 막상 나에게 닥치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진심은 사람을 흔들어 놓는다.

 나 역시도 가감 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쉽게 무장해제를 당했던 것 같다. 실컷 화내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진실되게 미안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그래도 화를 내긴 함..) 솔직하지 못해서 미안했어.라고 뒤늦게 고백하면 분했던 마음이 갑자기 눈물로 터져 나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기억이 없다. 나에게서도 타인에게서도 정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걸 본지 오래되었다.

  나도  '솔직히 말해서...'란 서두로 시작하긴 했어도 그 말 안이 모두 진실이었는지 자신할 수 없다. 쿨하지 못한 나를 인정하는 게 진짜 쿨한 거라는데 타인에겐 쿨 한 척 해도 내 감정에는 나도 찌질이었나보다.


 그래서 앞의 상황을 차치하고 저 드라마 전남편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찌질함' 대신 '솔직함'을 주고 싶다. 앞 일은 생각하지 않겠어. 지금 나는 네가 좋아. 받아주지 않겠지만 일단 솔직하게 말할래의 자세가 신선했다. 그것도 풋풋한 20대 대학생도 아닌, 잃을게 많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신분을 가진 남자가 하는 말이라서 더더욱.

 마음 정리를 끝내고 주인공의 새로운 남자에게, 

 "바람 같은 거 피우지 말고. 인생 선배로서 하는 말인데 뼈 아프다 정말.... 아직은 너랑 마주 앉아 있는 게 편하지가 않네"

라고 말하는 그 솔직함이 꽤나 부럽다.(근데 나 이 드라마 엄청 열심히 봤음? 대사 왜 외움?ㅋㅋㅋㅋ쓰다 깨달음ㅋㅋ)

 자니? 뭐해? 가 찌질함의 대표 문장으로 유명해진(?) 이유도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다기보다 대부분 술김에 찔러보기 식인 데다가(본인도 기억하지 못할뿐더러 다음날 후회하는)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하지 않고 에둘러 사람을 간 보는 데 그쳐 상대방을 짜증 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니? 뭐해?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는 주제가 딱히 없다. 진짜 자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찌질한 건 싫지만 솔직한 건 좋다.

 찌질하긴 쉽지만 솔직한 건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찌질함은 사람을 밀어내게 만들지만 솔직함은 적어도 사람을 멈춰 세우게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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