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이지만 쓸만했어.

2009 평점 낮은 세부 여행

by yosepina
정말 다채로웠던 3박 5일간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
나에게 있어서는 돌아오는 마지막 날 오지게 체해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토해내고 삼시세끼 쫄쫄 굶다가 혈당까지 내려가 머리까지 어지러웠던 것이 정말 잊지 못할 사건..

여행이 주는 여러 가지 좋은 이점 중에서 그 나라에 대해서 더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는 것이 참 좋은 점 같다.
(백날 먼 나라 이웃나라 읽어대도 돌아서면 까먹으니.. 원..)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사회문화적으로 여러 나라의 풍습들이 혼재되어 있고 실제적으로 독립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개도국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게 살고 있는 듯해서 순간순간 놀랄 때가 많았다.
관광객들이 많은 곳이면 어김없이 있는 아이들.. 손을 붙잡고 1달러를 외치며 애처롭게 보는 그 눈빛들.. 그런 심리를 이용해 아이를 빌려 앵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느 나라든 착한 사람, 못된 사람은 다 있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1년 내내 여름인 나라에 사는 것이 소원인 내게 필리핀의 1년 내내 여름 날씨와 국교가 가톨릭이라는 것과 좋아하는 열대 과일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는 내게 너무나 적합하였으나..
총기 소유가 자유로워 치안상태가 엉망이라 살 수는 없다고 결정하였다.
(누가 살라고 한대...?)



심상치 않은 기운

2009년 세부 여행. 힘들게 힘들게 그때 기록을 찾아서 그대로 옮겨보았다.

2008년 홍콩 멤버 그대로 2009년 연말 세부 여행을 갔다. 첫 해외여행이 그냥 그랬던 나는 이번 여행도 그다지 내키진 않았다. 매달 모았던 곗돈으로 가는 거라 안 갈 명분도 없었고 여전히 멋모르고 있을 때라(이때 사진을 보면 역시 모르고 있다. 휴양지에서 입어야 할 옷과 맞는 가방을..) 출국 이틀 전까지도 귀찮아...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여행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하다니!)

하필이면 출국 날 서울엔 눈이 내려 걱정이 많은 나는 공항버스 대신 지하철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나는 당연히 몰랐고 친구들도 몰랐다. 필리핀 세관의 악명 높은 면세품으로 용돈 벌기(?) 관행을. 나는 면세품도 화장품 몇 개 밖에 안 샀는데 친구들은 유난히 이때 무언가를 잔뜩 샀다. 면세품 가방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모습이 세관 직원 눈에 포착되었고 곧바로 사무실로 연행(?)되었다. 다짜고짜 물건을 두고 가라고 했다. 무서웠다. ㄷㄷ 친구 한 명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를 불러왔고 그러거나 말거나 직원은 물건을 두고 다시 출국할 때 찾아가라고 했다. 가이드는 상황을 파악했다.

'두고 갔다가 나중에 물건이 그대로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얘네들 나 모르겠다 해버리면 끝이다. 돈 달라는 것 같다. 300불 얘기하는데 200불로 합의해보고 돈 주고 나가자.'

200불에 바로 OK 하더라. 나 빼고 친구들이 100불씩 냈다. 종종 있는 일이라고 했다.

나중에 전문가가(?)되어 생각해보니 당연히 끌려갈만한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필리핀은 면세 한도가 아주 낮은데 그것도 규정대로 안 하고 내키는 대로 잡아댄다. 5년 뒤 다시 세부를 갈 때엔 최소 물품만 사되 비행기 착륙과 동시에 모든 면세품 포장을 해체하고 면세점 가방은 버린 채 쓰던 물건처럼 분산시켜 들고나갔다.

총 7명인 패키지 상품이었는데 같은 팀 4명이 한 시간이 넘게 우리를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니 민폐 민폐 그런 상민폐가 없다. 거듭 죄송하다고 차에 탔는데 다행히 좋은 분들이라 이해해주셨다.(속으론 욕했겠지만.. 겉으로 안 한 게 다행ㅎ)


날씨 요정 셋이 왔어요. 근데 비 요정이에요.

12월 말. 극 연말에 갔다. 필리핀은 너무나 건기. 날씨가 아주아주 좋을 때. 그런데 계속 흐리다. 흐리다 못해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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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의 말은 점점 변한다.

"잠깐 그치다 말 거예요. 여기 비는 그렇게 오래 안 와요."(첫째 날)

"날씨가 이상하네. 여기 비 몰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둘째 날). 우리는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와... 제가 여기 10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렇게 계속 비 오는 거 진짜 처음 봅니다." 셋째 날. 이젠 아예 우리를 보고 말했음

그렇다. 우리가 범인이었다. 우리는 개별로도 원래 비날씨 요정으로 유명했는데 셋이 합체했으니 말해 무엇하나. 건기의 날씨도 보기 드문 우기의 날씨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을 부렸다. (객관적으로 이후 각자 여행기를 봤을 때 나는 이제 그 저주(!)에서 벗어난 것 같다.)

그래서 사진은 온통 꾸물꾸물하다.


처음이었던 것들

이번에도 나는 일정도 모르고 따라갔다.(이렇게 발전이 없어서 커서 뭐 될래) 패키지라서 당연히 옵션이란 게 있었는데 그중 스킨스쿠버와 스노클링이 있었다.

스킨스쿠버는 셋 다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멋모르고 따라 들어갔다 엉겁결에 하게 되었다. 지금의 나라면 첨부터 안 한다고 발을 뺐을 텐데 몰라서 했다.(이래서 사람은 아는 게 없어야 겁도 없어져..) 쫄보&겁쟁이인 나로서는 손으로 꼽는 성취물(!) 중에 하나다.(아마도 일 번은 운전면허증..)

스노클링도 뭔지 몰랐는데 바다 한가운데 떨어뜨려놓고 하는 거라고 해서 처음엔 기함을 했다. (수영 못함. 발 안 닿는 곳 무서워함) 근데 하니까 재밌다. 할만하다. 이후 나는 스노클링 매니아(?)가 되었다. 스노클링 장비를 살까 늘 고민하는데 부피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덕분에? 캐리비언 베이&오션월드 파도풀에서도 발 안 닿는 끝까지 가서 잘 논다. (친구들은 무섭다고 해서 늘 끝에서 혼자 온 사람처럼 놀지만..)

여윽시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려면 해봐야 안다.(라고 하지만 겁이 많아서 시도 잘 안 함)

12월 31일을 외국에서 처음 맞았다.(처음이자 아직까지 마지막) 리조트에 있는데 불꽃놀이 소리가 나서 1층으로 다들 내려왔다. 모르는 외국인들끼리 해삐 뉴 이얼~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벅찼다기보다 왠지 슬펐다. 방으로 올라와서 준비해 간 편지지에 친구들에게 새해 편지를 써서 주었다.(왜 그랬을까... 오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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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만 열고 나가면 다른 세상이

우리가 묵었던 비 리조트는 라는 곳은 급이 높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아기자기한 작은 리조트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조트 밖으로만 나가면 펼쳐지는 풍경이 그 당시엔 꽤나 충격적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 다 헤진 옷과 맨발이다시피 한 아이들이 길거리에 뛰어다녔고 지프니를 타고 내릴 때마다 아이들이 기다리며 동전을 달라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당장 몇 푼을 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니 주지 말라는 가이드의 당부가 있었는데 해맑은 아이들의 눈을 보니 마음이 더 불편했다. (친구 한 명은 이때 경험이 너무 충격이었는지 필리핀 하면 아직도 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일어나는 도로 한편에서 사람들이 노래를 틀어놓고 춤추며 함께 저녁을 나눠 먹던 모습. 내가 그들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그들이 훨씬 더 행복해 보였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튀어올라 눈물이 차올랐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제 점수는요...

총점과 평점은 객관적으로 좋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친구 1은 부랴부랴 출국날 논문을 제출하고 출국했지만 결과적으로 제출이 잘못되었고 입국하면서부터 세관에 끌려 들어갔고, 친구 2는 친구1꺼까지 이티켓을 잃어버려 가이드와 함께 어렵게 프린트되는 곳을 찾아가느라 일행에게 또 민폐를 끼쳤다. 나는 마지막 날 대단한 토사곽란이 와서 생애 아팠던 기억 5에 드는 고통을 경험했으며 셋이 함께 가 비 내리는 날씨를 연출했기에 휴양지스러운 사진도 한 장 못 건졌다. (심지어 그런 사진이지만 원본도 없다. 싸이월드에서 편집된 몇 장을 가져옴. 사진 주인도 못 찾는다 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기 전 귀찮아했던 마음과 달리 돌아와서는 아련함이 전과 달리 오래 머물렀고 여운은 길었다.

그 이유를 나는 내 여행의 취향이 관광이 아닌 휴양이었다며 섣부르게 판단했다.

내 안의 여행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음을 모르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던 것들
이번 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느꼈는데 역시 나의 여행 취향은 절대 쇼핑, 관광이 아닌
휴양이라는 걸 체험을 통해 더욱 절실히 느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내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얻어'오는 것이 아닌 '버리고'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시간.
그곳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어떤 환경도, 나를 재촉하지 않고 닦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자아를 찾으려 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걱정이라는 말을 앞세운 그런 부담스러운 말투와 눈빛들도 다 잊고 싶었다.
문자 메시지 따위에 얽매이는 것도 놓아버리고 싶었고 끊임없이 비교대상들을 바라보며 초조해하는 나 자신도 풀어주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만을 생각한다'는, 그래서 일할 의욕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필리핀 사람들의 그런 환경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비록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을 면하지 못하고 살고 있겠지만 자극이 없어 발전이 없다고 해서 행복지수가 낮은 건 아닐 테지.
(.....)
오늘 내로 무엇을 해야만 하고, 이달 내로 이 일을 끝내야만 하고, 서른이 되기 전엔 반드시 무엇을 해야만 하고, 그런 굴레들을, 대체 누가 무슨 근거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 기준들을 잠시 마나 허물어버리고 싶었다.
마지막 날, 어느 순간 그 나라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으면서 동시에 공항에 도착하면 밀려올 갑갑증이 벌써부터 밀려오는 듯 해참 야릇한 기분이 되었다.
(....)
그래도! 비록!
달콤한 짧은 휴가였지만 잠시나마 쓸데없는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시간이었음엔 틀림없다.

-2010.1월 초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