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는 사람은 이해할 것 같은 이야기
나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이 찾아오는 순간은 이상한 순간들이다. 내게 연민은 공감보다 더 어렵고 난처한 감정이다. 공감은 이해에 기반한다. '나도 너의 슬픔을 알아'가 전제된 감정이 공감이라면, 연민은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일단 마음이 미어지는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연민이 공감보다 더 큰 감정이라고 믿는다. 지도 못난 주제에 남 걱정한다는 점에서 미련하고 바보 같고 그래서 아름답다. 고시원에 살던 시절에 자주 나를 찾아오던 연민이 있었는데, 그 시절에 쓴 일기를 옮겨 본다.
며칠 전, 슈퍼를 지나고 있었는데 어떤 고등학생이 통유리 앞에 진열된 과자 한 봉지를 집어 가게 안으로 들어가다가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은지 돌아와서는 또 한 봉지를 집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너무 슬펐다. 나는 새벽 서너 시쯤에 라면을 먹으러 24시 편의점에 간다. 이따금 내 또래의 애들이 검정 봉지를 달랑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그때 나는 이상한 감정이 드는데 (아마도) 슬픔에 가까운 감정인 것 같았다. 초등학생 때도 그랬다. 반에 좀 통통한 애가 있었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티셔츠가 땀에 절어 등에 딱 달라붙었는데 그 등이 너무 슬펐다. 이해할 수 없는 연민이었다.
-문보영, '준최선의 롱런'中-
고등학생이 과자 한 봉지를 더 집어 가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나도 너무 슬퍼졌다. 그게 왜 슬프냐고 물으면 정확한 이유와 감정은 서술할 수 없다. 초등학교 때 반 친구의 땀에 절어 들러붙은 티셔츠를 바라보던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아직까지 기억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가의 마음에도 연민의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공감했다.
무슨 마음인지 알아. 슬픔에 가까운 연민이란 표현 앞에 왜 늘 '왠지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이라는 수식을 붙일 수밖에 없는지도. 그리고 이런 표현과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숨겨놓은 내 외로움이 덜어지는 것 같아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A언니 : 그런 생각 들지 않아? 내가 그 사람한테 빠졌던 건지, 그 사랑에 빠졌던 건지, 사람한테 빠지는 게 더 치명적인 건지, 사랑에 빠지는 게 더 힘든 건지...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한테 빠지는 게 더 힘들 거 같거든. 나한테 잘해주고 좋아해 주는 게 좋은 거면 다른 사람이 해줘도 되지만 그 사람한테 빠지면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얼마 전에 이 얘기했다가 완전 공격받았어.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 왜 하냐고. 적당히 좀 하라고. 해결 안 되는 얘기라도 하고 싶지 않아? 기분 좋은 술자리서 왜 그런 얘기 하냐고 구박받았다.
나 : 진짜요? 교육원 동기들이?
A언니 : 아니... 고등학교 친구들이
나 : 아~~~ 그러니까 그렇죠.
올 초에 B 언니가 그런 얘길 했는데 노희경 작가가 그랬단다. 지나고 보면 교육원 동기들이 정말 소중한 재산이라고. 언니는 첨에 그 말이 잘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젠 그 말을 알겠다고 했다. 일반인(?) 중에서 같은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없다고. 다들 넌 아직도 그러냐, 예민하게 왜 그러냐,라고 핀잔준다고. 나도 언니 말을 들을땐 잘 몰랐는데 연수반 종강할 때쯤에 그 말을 좀 알게 됐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내 생각에 대해 같이 생각해준다는 거... 그 자체만으로 굉장한 위안이 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생각 좀 그만해"
"그런 생각을 그러니까 왜 하냐고."
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 사실 그 자체만으로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근데 또 너무 그러지 말아 달라고 표현을 하면,
"그렇게 약해 빠져서 어떻게 살려고"하는 식의,
"정말 사서 고생한다"는 식의, 비난이나 질책으로 되돌려 받는다. 핑계 같지만 내 경우는 그래서 입을 닫는다.
교육원 동기들... 자주 보지 않는다.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다. 특별히 말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일부러 물어보지도 않는다. 서로의 과거, 가족관계, 하는 일, 연애사 등... 성격도 다들 다르고 각자의 생활에 침투해 있는 정도도 아주 낮다.
그럼에도 엮이고 묶이는 게 있다.
"그런 거 있지?"
"어어어어!!!"
하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통함.
남자, 결혼, 육아라는 테마를 모두 제외해도 대화 소재가 무궁무진하다는 안도감.
(...)
-2010년 12월 2일 미니홈피 기록 中-
(처음 보는 사람들은 잘 믿지 않지만) 여전히 낯가림이 심하고 불편한 인간관계에서 에너지 소모가 남들보다 월등히 많은 나 자신을 깨닫고 난 뒤에는 소모적(이기만)인 모임과 관계는 모두 청산했다.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 수로 내 외로움의 값이 책정되는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진작에 깨우쳤으니까.
진짜 외로울 때는 만날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없는 때가 많아졌다는 걸 실감할 때다. 코드 맞는 사람을 만나 (남들이 보기에) 시답잖은 소리 배틀을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
".... 통계적으로 치매에 걸린 사람들 성격을 분석했더니 그렇더래.. 그래서 생각했어. 아.. 평생을 주변을 편하게 하고 스스로를 혹사시킨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건 치매 걸린 이후인가? 어쩌면 본인 스스로는 가장 행복한 때가 그때가 아닐까 하는.."
"자존감이 정말 점이던 시절이었는데 선거 유인물이 우편함에 꽂혀 있는 걸 보는데 순간 너무 울컥하는 거야. 뭔지 알아? 아.. 나도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이구나. 나를 필요로 하기도 하는구나. 나 살아있는 사람이구나, 인정받는 느낌."
"여름휴가철만 되면 섬에 그렇게 버려진 동물들이 많다는 거야. 이유가 뭔지 알아? 그냥 버리면 집에 찾아올까 봐 그런다는 거야. 나 정말 너무 충격받아서 그걸 TV에서 보던 순간이 박제된 기억으로 있거든.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면 상처 주는데 그렇게 적극적일 수가 있을까.. 그 이후로 아무 상관없는 얘길 하는데도 TV에서 섬만 보이면 자동기억 재생돼서 좀 괴로워."
먹고살기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이런 헛소리를 하루 종일 지껄이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상한 소리로 치부당하지(?) 않고 진지한 경청과 공감의 눈빛을 얻고 싶은데, 각자도생에 바빠 이제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일반인' 에게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진짜로 '응? 뭔 개소리? 너 혹시 진지충?'이라는 비언어적 신호를 읽을까 봐 혼자 삼키고 만다. 운이 나쁘면, "아직도 그러고 사냐? " 내지는 "그냥 좀 대충 살아."라는 비난을 듣게 될 수도 있다.(물론 이렇게까지 무례한 반응이 나오면 이젠 상처만 받는 사람이 아닌, 똑같은 무례함으로 응대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래서인지 한 번씩 어라? 하게 금사빠처럼 이성에게 마음이 휙 넘어가는 순간도 대부분은 그런 타이밍이었다.
어?! 얘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네? 포인트를 짚네? 하는 한 순간.(가장 어렵다던 '말이 통하는' 이상형)
그러면 갑자기 안 외롭다. 무슨 말이든 해도 될 것 같아 용기가 나고 안심이 된다.
평소에도 소수정예의 깊은 인간관계만(좁은 인간관계의 고급 표현) 가느다랗게 유지하며 사는데 외출과 약속이 줄어들며 그나마의 소통도 많이 단절되었다.
예민한 것이 나쁜 게 아니고, 유별난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라고.
그래도 괜찮다는 이해와 나도 그렇다는 깊은 공감이 필요했었는데 그럴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조금 슬퍼졌었나 보다. 저 문단을 두세 번 반복하며 읽고는 한동안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래.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일반인들'이 '쓸데없는' 것이라 규정짓는 생각들을 내밀하게 털어놓는 사람이 이토록 많으니 곧 망할 거라던 종이책은 오늘도 쉼 없이 발행되고 있는 거겠지. 하루에 브런치에 '예민'과 '내향'의 키워드로 글 쓰는 작가가 저렇게 많은 것만 봐도.
주류가 아니어도 괜찮아. 소리 내지 않는 비주류가 이렇게 많다면 사실은 비주류가 아닌 거지 뭐.
일방통행 같지만 그렇게 씩씩하게 단정 짓고 스스로를 또 위로한다.
다른 사람들이 다 A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A가 아닌 것 같아서 외로워질 때, 각자의 삶에서 만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규격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선 안 만날 수 없는 누군가의 뒷담화를 쏟아내고 싶을 때. 잠시나마 '사회생활' 스위치를 끄고, '무난한 사람'의 탈을 벗어놓은 채, 내 안의 진심을 쏟아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정말 위로가 된다.
-강세형, '희한한 위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