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살아가는 법
예능 프로그램에 남자 아이돌이 떼로 나왔다. 그중 A가 발언을 하고 있다.
나 : 쟤 B랑 아직 사귀어?
그녀 :.. 음..
나 : 헤어졌다는 기사 아직 못 본거 같으니 사귀나 보다. 근데 곧 헤어지겠지 뭐.
그녀 : 그럴 거예요. 왜냐하면 B가 요즘 해외 활동 때문에.. 바쁘고.. 또..(어쩌고 저쩌고)
나 : 서로 스케줄이 바빠 소원해져서 좋은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됐다고 기사 뜨겠지.
그녀 : 저 중에 근데 누가 젤 나이 많지?
나 : C 아냐?
그녀 : D 아니에요?
나 : 아냐. D 나이 안 많아. 애기 때 데뷔해서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그녀: (인터넷 검색 후) C가 92년생이래요. D는 93년생.
나 : (으쓱) 거봐. D가 어리지?
여기에서 그녀는.. 나의 초등학생 조카이다. 어릴 때부터 언어발달이 남다르고 생각이 조숙하여 성인과 대화하듯 소통이 가능한 그녀이다.
물론, 아직 초등학생의 신분을(!) 숨길 순 없는지라 대화에 장애가 있을 때도 있다. 이를테면,
그녀 : 슈퍼주니어가 샤이니보다 먼저 데뷔했어요?
나 : 어! 슈퍼주니어가 먼저 했지.(라고 당당히 대답해놓고 맞나? 잠시 생각함.)
나는 요즘 아이돌은 모르고(그녀에게 엑소까지 겨우 외워놨더니 이젠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고 실토함) 그녀는 아이돌 박사이지만 본인의 출생 이전의 가수들은 억지로 외우지 않고서는(내가 엑소 얼굴과 이름 매칭에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모르기 때문에 그 이전의 아이돌 가계도는(!) 나에게 묻는다.ㅠㅠ
그런 그녀에게 얼마 전 슬픈 일이 생겼다. 애지중지 키우던 햄스터가 명을 다 한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그녀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당부를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내가 키운 반려동물 경험을 물었다.
나 : 이모는 거북이 몇 번 죽고 나서는 다시는 뭐 안 키우겠다고 했어. 마지막 거북이 죽었을 때 너무 슬퍼서. 너는? 와플이(햄스터 이름) 죽고 나면 또 키울 거야?
그녀 : 고민 중인데.. 키우고 싶어요.
나 : 햄스터 수명이 짧아서 또 죽을 건데 괜찮아?
그녀 : 그래도... 키우는 동안 저한테 준 기쁨이 너무 컸어요.
마음이 뜨끔 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모 작가의 '죽는 게 겁나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다 키우기 싫다'는 말에 '맞아. 나도 동물은 안 키워. 절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마음 다치고 싶지 않아. 상처 받고 싶지 않아.' 전적으로 동의하며 장문의 글을 쓴 적도 있었다.
햄스터의 수명이 2~3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고 나서 역시 나는 절대로 못 키우겠다며 새삼스레 다짐 비슷한 것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다가올 상처를 겁내지 않고 현재를 사랑하는 방법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햄스터는 그녀 곁을 떠났고 대성통곡을 하며 며칠 동안 식음전폐 수준까지 앓아누웠단 얘기에 마음이 쓰여 나도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너한테 와서 행복하게 지내다가 갔을 거라고. 서로 큰 행복을 준 거니까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자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자란 꽃은 뿌리가 약해서 금방 꺾이지만 바람과 비를 맞으며 자란 꽃은 뿌리를 깊게 내리면서 더 잘 자라니까 너도 단단해질 거라고.(나는 못 그러면서?)
이상한 허세처럼 중2병 말을 해댔는데 이해력이 좋은 그녀니까 찰떡같이 알아 들었으리라 믿는다.
마음을 추스르는 과정에서 그녀는 학교 과제를 통해 슬픔을 그림으로 승화(?) 시키기도 했는데 와플과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와플을 자신의 양육자로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회복이 된 후 다시 만난 그녀는 평소와 같이 재잘대며 와플이의 죽음을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하다 할머니와(나의 엄마)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그녀 : 와플이 죽었다고 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마음이 또 덜컥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대답은 엄마가 했다. 그녀가 다이렉트로 나에게 저 질문을 했으면 난 바로 답할 수 있었을까.
기분이 어땠어요?... 라니..
마음이 어땠냐는 질문은, 최근 몇 년의 기억을 아무리 거슬려 올라가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래서 뭐라고 했어?'와 같은 행동과 생각에 대한 질문만 자연스럽게 주고받았을 뿐.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 감정을 물어보는 질문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너무 신선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저런 질문은 보통 상담할 때 상담자가 내담자의 감정을 꺼내려고 집요(!)하게 하는 걸로 아는데..)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정확히 물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난 지금 슬픈 거야? 우울한 거야? 화가 나는 거야?'와 같은 질문. 그냥 뭉뚱그려 '짜증 나'로 통합해버리곤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달랐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타인의 감정을 묻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최근 새로운 햄스터가 그녀의 가족이 되었다.
아프지 말고 꼭 오래오래 행복하자고, 와플아 네 몫까지 잘 키울게.라고 말하는 그녀의 기개(!)에 절로 부끄러움과 존경스러움이 피어오른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상처 받지 않으려고 뒷걸음질만 쳐온 내 행동과 도망가기에 바빠 모른 척했던 나와 타인의 감정들. 그 때문에 한 치 앞도 자라지 못한 내 미성숙함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처 받는 것을 겁내지 않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상실과 슬픔을 극복한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한 회복탄력성으로 조금 더 성숙하고 단단해졌으리라.
내 감정에 솔직하고 타인의 마음을 이끌어낼 줄 아는 그녀의 사랑스러움은 점점 더 반짝반짝 빛나리라.
*사진은 그녀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서 무단 도용함.
조카가 고소하면 나 철컹철컹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