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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곰 Aug 18. 2018

'82년생 김지영'은 왜 유해한가

82년생 김지영(2016)


   나는 왜 언제나 피해자일까? 나는 왜 언제나 당하고만 살까? 왜 나에게만 이런 불행이 닥칠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대부분은 여기에 갇힙니다. 그리고선 자신이 완전무결한 피해자라는 망상에 빠지거나, 역으로 그 짓을 하는 망상에 빠지게 됩니다. 혹은 죽창을 들고 여기저기 엄한 곳을 찌르기도 하죠.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좀 더 깊이 생각합니다. 바로 '왜', why에 집착하는 것이죠. 이유와 본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결국 역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을 만듭니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부류의 책이 아닙니다. 다른 위대한 소설처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지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안 한 것에 가깝습니다. 작가 조남주는 이 책을 내면서 우리 사회의 '82년생 김지영'들이 공감했으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즉, 작가는 이 책을 단순한 공감과 위로를 위해 썼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책이 불행 포르노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여러가지 불행을 나열해놓고, 주인공의 피해자성을 두각시킵니다. 그리고선 이를 독자에게 이입하려고 하죠. 작가가 여러가지 통계를 인용한 것, 그리고 82년생 여성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영을 썼다는 것은 이를 위함입니다. 작가 역시 이를 시인했죠. 여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끔찍한 일 중 흔한 일만을 나열한 것도 이를 위한 고도의 작업입니다.


  김지영이 가고 싶었던 신문방송학과를 포기하고 안정적인 수입과 결혼을 위해 교대로 간 것은 사실 그 세대에서 흔히 일어났던 일입니다. 지금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요. 이상한 사람이 김지영을 쫒아오는 것도, 남자 선배들이 김지영씨가 안 보는 자리에서 김지영씨가 연애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씹다 뱉은 껌'이라고 뒷담화하는 것도, 육아로 인한 직장에서의 차별은 모두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과장되지 않고 마치 실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덤덤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이 현실성은 이 소설이 불행 포르노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진 못합니다. 확실히, 이 책은 현실적입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다수의 여성들이 이와 같은 일을 최소 몇 가지는 겪었습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죠. 하지만, 대부분의 불행 포르노 역시 현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남성들의 단골 불행 포르노인 군대 이야기를 보세요.


  군대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자면 아직도 수많은 사병들이 선임들에게 구타를 당하거나, 괴롭힘당하고 있습니다. 전투와는 상관 없는 사사로운 잡일에 끌려가는 경우는 정말 잦습니다. 윤창중 대장의 공관병 사례만 봐도 이는 여실히 드러납니다. 간부는 더 심각합니다. 언론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사병 문제와 달리, 간부의 경우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라는 굴레에 갇혀 이를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군대 이야기가 불행 포르노인 이유는, 이에 대한 고찰이나 해결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비참하고 억울하고 힘들다는 항변을 위해서만 이용할 뿐이죠. 군대에서의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글 중 군대의 구조, 즉 전쟁을 위한 조직이기 때문이라는 근본적인 이유와 그 특성상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군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은 극소수입니다. 네이버 뉴스의 덧글이나 블로그 글, 혹은 이야기를 통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자신이 이렇게 고생하고 왔으니 대접하라는 것. 그 뿐입니다. 문제의 해결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이야기죠.


  82년생 김지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82년생 김지영에선 여성혐오 사회에 대한 고찰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선악설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은 폭력성을 고찰한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과는 달리, 82년생 김지영은 단순히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주치는 부조리와 불행만을 나열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불행을 전시한 것이죠. 이는 근본적으로 대한민국의 군대 이야기와 결을 같이 합니다.


  82년생 김지영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소설의 목적은 불행의 전시입니다. 이 책을 읽고 얻는 것이라곤, 여성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느냐입니다. 이 소설에서 '왜' 여성이 불행하게 살고 있는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책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여성이 대물림을 통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뿐이죠.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원인, 이를테면 가부장제의 공고함, 성별 고정관념, 남성성의 근본적인 문제 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82년생 김지영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는 이 소설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작가 조남주는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고찰할 수 있는 소설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놓쳤거나, 아니면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 소설에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다른 문제였고, 여성 멸시(대부분은 여성 혐오라는 말을 씁니다)는 수단, 소재로만 썼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고찰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제는 현대 대한민국에 만연한 여성 멸시입니다. 조남주는 이 여성 멸시에 대해 충분한 고찰을 했어야만 했습니다만, 작가는 이 부분을 방기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잘 팔리는 서사는 세 가지입니다. 피해자 서사, 사이다(갑질) 서사, 그리고 우월 서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 세 가지 서사는 동시에 굉장히 위험한 서사입니다. 피해자 서사는 독자가 스스로를 완전무결한 피해자로 여기게 합니다. 이는 독자가 자신의 피해자성에만 안주해 주저앉게 만들거나, 혹은 다른 유해한 서사에 정당성을 마련해주죠. 사이다 서사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를 만드는데에 일조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질서를 망가트립니다. 우월론 서사는 제일 심각한데,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실 우리가 우월하니 원래 우리의 것이었던 우월한 위치를 되찾아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퍼트립니다.


  82년생 김지영이 위험하고 유해한 도서인 이유는, 이 서사가 피해자 서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서사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자적 위치에 안주하고 더 나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피해자성에 안주해서 더 나은 논의와 방법을 찾는 걸 막죠. 이게 언더도그마와 결합하면 끔찍한 결과가 초래됩니다. 자신은 그동안 피해를 봤고 탄압받았으니 내가 그것을 돌려줄 차례라는 사고를 하게 되죠. 결국 사이다 서사와 우월론 서사에 정당성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때때로 서사는 현실을 움직입니다. 해리엇 스토우 부인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노예제 폐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죠.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많은 사람들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희망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서사를 다루는 사람은 신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이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소설가들은 이 책임을 무시하고 방기하며 제멋대로 쓴 글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조남주 작가 역시 이들처럼 서사와 현실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습니다. 마치 군대 포르노, 맨박스 포르노를 양산하며 여성혐오를 부추기는 작가들처럼 말이죠.


  조남주 작가는 단순히 피해사실 나열, 피해자 서사에서 머물러서는 안 됐습니다. 이 사회가 왜 여성멸시 사회인지를 누구보다 철저하게 분석하며 사고하여 근본을 파헤쳐야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결책도 내놓아야 했겠죠. 하지만 조남주 작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남주 작가는 이 책으로 돈을 많이 벌어들였을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냈다는 것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

 

  이렇게 혹평을 써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아예 나쁜 책은 아닙니다. 사실을 담담하게 말해 현실성을 높였다는 점, 비록 통계를 잘못 인용하여 오점을 남기긴 했으나 전체적인 사실을 과장없이 현실적으로 기술했다는 점, 그리고 문장의 호흡이 짧아 읽기 편했다는 점은 칭찬할만 합니다.


  여성독자분이 이 책을 읽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대신, 남성독자분께 이 책을 권합니다.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를 알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도서는 없습니다. 꼭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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