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는 늘 나에게 관대했다. 그들은 나에게 오롯이 스스로 선택할 것을 종용했다. 그들이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했지만, 살아가는 건 너의 몫이라고 했다. 다만, 선택은 오직 너 혼자 할 테지만 그 책임만은 같이 지겠다고 했다. 그게 당신께서 생각하는 부모의 역할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결혼을 선포했다. 스물여섯의 나이었다. 내가 신랑으로 점찍은 남자는 고작 스물 넷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부모는 놀라울 정도로 나의 선택에 관여하지 않았다. 대학 원서를 쓸 때 조차도 그들은 나에게 별다른 말이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너는 먼저 손을 뻗을 아이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건 네 선택에 확신이 있다는 거겠지 하며 그제야 어느 대학을 썼는지 물었을 뿐이다. 늘 그랬다. 너의 선택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설령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그때가 비로소 당신들께서 나설 때라고 했다.
손끝이 시리다 못해 하얗게 얼어붙는 게 느껴지는 추운 겨울. 아직 연말의 다소 어수선하고 밝은 공기가 거리를 지배하기 전, 12월이라는 글자가 낯설던 때에 나는 남자 친구를 데리고 고향으로 향했다. 긴장한 채 선물로 준비한 전통주를 품에 끌어안고 얼어있는 남자 친구를 옆에 두고 좌석 버스에 몸을 구겨 넣었다. 건조한 히터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엄마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엄마, 나 결혼할 거야. 말했지? 벌써 그쪽 부모님께는 인사도 드렸어. 언제 내려가면 될까? 엄마랑 아빠도 봐야 하잖아, 사위."
엄마는 너희가 시간이 될 때 오라고 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금요일을 이야기했고, 그렇게 약속이 성사되었다. 엄마한테 듣는 말로 아빠가 소고기를 먹자고 했단다. 당신은 소고기를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 나라면 끔찍하니, 너희 아빠께선 네가 그 누구를 데리고 와도 눈에 차지 않아 하실 거라던 주변의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그래도 소고기 먹자고 하니까 벌써 마음을 연 건 아닐까?
터미널로 우리를 마중 나온 엄마는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한 번 안아보자, 니가 수혁이니? 잘 왔어."
엄마야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사교성이 밝고 인정이 있다. 문제는 아빠다. 나의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아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저렇게 말 한마디 없는 애랑 무슨 재미로 사니?' 그 정도로 아빠는 수더분한 성격이다. 지금에서야 외할머니께도 엄마, 엄마 하며 누구보다 다감한 사위 역할을 하고 있다지만 그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가 아빠는 퇴근하고 따로 올 것이라며 먼저 예약한 곳으로 가있자며 차를 몰았다. 자리에 앉고 밑반찬이 세팅될 때쯤 아빠가 나타났다. 인사는 늘 같다. 나름대로 반가움을 담은 어어- 와 우리 딸이라고 나를 부르는 말. '어어- 우리 딸.' 옆에서 수혁이가 일어나 인사를 한다. 아빠가 악수를 권한다. 자리에 앉는다.
'우리' 가족의 첫 저녁 식사
남자 친구가 준비해 온 선물과 편지를 건넨다. 노안이 온 나의 아빠는 편지를 멀찍이 들고 읽는다. 엄마는 무어라고 쓰여있는지 읽어달라고 한다. 남자 친구의 얼굴이 터질 것만 같다. 아빠가 편지를 내려놓는다.
고맙다는 말을 할 줄 알았다. 대신에 아빠는 대뜸 수혁이를 부른다.
"아들!" 이라고.
"아들, 아빠가 너희의 결혼을 허락한 이유가 있어. 일단 첫째로 나는 내 딸의 선택을 믿기 때문이야. 내 딸이 그 정도 사람 보는 눈도 없을까? 내 딸이 한 선택이 잘못되었을 리 없지. 그러니까 나는 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둘째로, 사람이 한 번쯤 살면서 좋아하는 사람이랑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나는 그렇게 생각해. 좋아하는 사람이랑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거든. 내 딸이 좋다고 하니까 나는 말릴 이유가 없어. 아빠는 이제 너도 내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혁이 너도 부모님이 계시니까 알 거야. 한 평생 나를 길러준 부모와도 안 맞는 부분이 얼마나 많니. 그런데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우리가 가족이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그래서 엄마랑 아빠도 노력할 거야. 가족이 되는 건 노력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희한테만 잘하라고 하지 않을 거야. 같이 천천히 알아가자.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만 기억해라. 너희가 살아가면서 힘들 때 항상 우리가 뒤에 있을 거야. 여태까진 내 딸만을 책임졌다면 이제는 너희를 책임질 거야."
아빠가 말하는 걸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아빠가 저토록 길게 말을 늘어놓는 일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집에서 며칠이고 혼자 연습했겠지. 내가 아는 아빠라면 그랬을 것이다.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이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집으로 돌아가선 빼놓은 말이 없는지 점검할 것이다. 그럴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아빠는 우리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선 우린 이미 가족이 되었다. 아빠의 말을 듣고 나는 이미 결혼식을 올린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이날이 나로서는 처음 부부가 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