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 목걸이는 뭐야?”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반짝이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내 눈에 아빠의 은색 목걸이가 들어왔다. 아빠의 하얀 런닝 위에서 움직임에 따라 빛을 반사하던 목걸이. 아빠는 목걸이에 대해 묻는 나를 번쩍 안아 드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건 아빠가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 되었을 때에도 채린이 아빠라고 알려주는 목걸이야” 라고 말이다. 나는 아빠의 품에 안겨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땐 아빠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아차리기엔 너무나 어렸다.
아빠가 하셨던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은색 목걸이는 어린 내가 탐낼 만한 예쁜 액세서리가 아니라 군인이라면 누구나 발급받는 군번줄이었다. 군번줄은 전시에 군인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해 의식이 없을 경우 인적사항과 의료정보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유전자 감식 기술이 크게 발달하기 전에는 전사자의 시신이 크게 훼손되었을 경우 군번줄만이 유일한 확인 수단이었다고 한다. 아빠는 어린 나에게 이러한 사실을 에둘러서 말해주었던 것이다. 아빠가 우리 아빠라고, 나의 사랑하는 아빠라고 알려준다던 저 반짝이는 은색 목걸이는 아빠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아빠는 군인이다. 그것도 분단 국가의 군인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엔 언제든 70년 전의 비극이 발발할 수 있으며, 그때 아빠는 자신의 직업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일상은 안온하기만 했다. 전쟁의 위협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아빠가 다른 아빠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저 언제나 짧은 머리를 유지한 채 개구리 무늬 군복을 입고, 보기만 해도 답답해 보이는 군화를 신고 출근한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훈련이 있을 때면 아빠는 며칠씩 집을 비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엄마와 함께 아빠를 기다리는 건 제법 애틋한 일이기도 했다. 아빠가 언제나처럼 집으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밤이었다. 일주일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거실에서 다같이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아빠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는 굳은 표정으로 짧게 대답을 하더니 다시 군복을 챙겨 입었다. 잠시 후 엄마는 아빠의 전화를 받고 표정 없는 얼굴로 아빠의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겼다. 급히 집을 떠난 아빠는 며칠이고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아빠의 부재는 평소에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긴장된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뉴스에서는 연일 ‘천안함’, ‘피격’, ‘북한 도발’ 같은 단어들이 보도되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격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아빠가 없는 집에는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전쟁이 끝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평소엔 아이들의 웃음 소리로 시끄러웠을 아파트 단지가 무섭도록 고요했다. 군인 아파트에 살았던 만큼, 다들 나와 같은 마음으로 불안하게 집안에서 저마다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적막을 깨면서 전화벨이 울렸다. 아빠였다. 목소리를 듣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지금도 아빠의 목에선 군번줄이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딸~ 뉴스에서 봤지? 걱정하지 마. 별 일 없을 거야.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 딸은 아빠가 꼭 구하러 갈게. 아빠 믿지?” 정말로 전쟁이 터진다면 이대로 아빠 얼굴을 두 번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믿는다고 대답했다. 아빠는 나를, 그리고 이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니까.
며칠 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비상 대기가 끝나고 아빠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안전하게 돌아와주었다는 것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이름 모를 신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던 그때의 감정이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다. 아빠는 내년이면 드디어 제대를 한다.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빠의 목에서 흔들리던 은색 목걸이와 드디어 안녕을 고하게 될 것이다. 이제 곧 국가 안녕의 수호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 두고 우리 가족만을 위한 영웅으로 거듭날 아빠, 나의 영웅에게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