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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 Jul 09. 2021

최초의 죽음, 안녕 뽀삐.

나는 그때의 슬픔을 바닥에서 건져 올릴 단어를 찾지 못했다.

07/09

최초의 죽음


최초에 뽀삐가 있었다. 뽀삐는 나와 관계 맺은 첫 번째 강아지다. 애석하게도 뽀삐의 생긴 모양새는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굴에 털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어 뽀삐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는 무대의 막을 걷어 올리듯 털들을 좌우로 갈라내야 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세월이 흐르며 낡아버렸다. 이제는 뽀삐를 기억해내기 위해서 기억의 오래된 장막을 걷어야만 한다.


내가 엄마에게 혼이 나 풀이 죽어 있을 때면 뽀삐는 발소리도 없이 곁에 다가와 내 무릎 위에 턱을 턱 하니 올려 두곤 했다. 뽀삐의 느긋하게 흔들리는 꼬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금방 서러움을 잊었다. 따듯한 체온은 서글픈 마음을 사르르 녹게 만들었다. 뽀삐는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말했다. 진실한 마음은 말을 통하지 않고도 전달될 수 있다. 뽀삐의 눈빛이 증거였다. 


뽀삐와 함께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물웅덩이를 세계 제일의 풀장으로 만드는 법도(뽀삐와 함께 흠뻑 젖은 몸으로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우리 둘을 공평하게 혼내셨다.), 다른 차와 아빠 차의 엔진 소리를 구별해내는 법도(뽀삐의 귀가 쫑긋거리면 아빠가 집에 도착한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진득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진리도(간식 앞에서 뽀삐는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기다릴 줄 알았다.), 모두 뽀삐에게 배웠다. 감히 말하건대, 뽀삐는 진정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뽀삐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쳤다. 뽀삐는 나에게 죽음마저 가르쳤다. 당시 아직 새댁이던 엄마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던 미자 이모와 친하게 지냈다. 우리 집과 미자 이모네 집은 길만 건너면 바로였기 때문에 나는 자주 두 집을 오가며 지냈다. 차선이 둘 뿐인 시골의 작은 도로, 지나다니는 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횡단 보도 하나 없는 이 작은 도로를 위험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미자 이모네 집에 가는 중이었다. 엄마의 신신당부대로 한쪽 손을 번쩍 들고 길을 건넜다. 뒤를 돌아보았을 땐 건너편에서 뽀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큰 일이다. 뽀삐는 손을 들 줄 모르는데.


나를 향해 달려오던 뽀삐는 차에 치였다. 당시의 나는 죽음은 몰라도 차에 치이면 많이 아프다는 건 알았다. 뽀삐를 들이박고 잠시 멈춰 섰던 차는 이내 다시 달렸다. 고개를 넘어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이라면 욕이라도 퍼부을 수 있었겠지만 어린 나는 무력했다. 다만 뽀삐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누워있는 뽀삐에게 다가가 평소처럼 끌어안았다. 뽀삐의 몸은 힘없이 늘어졌다. 


뽀삐를 품에 안은 채 마당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뽀삐는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엄마, 뽀삐가 안 움직여.” 지금의 나만큼이나 어리던 엄마는 어린 딸이 죽은 개를 안고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는 걸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린아이 앞에서 강아지를 치고 그대로 달려나가던 운전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처음으로 실감한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뽀삐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게 된 이제서야 나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죽음을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그때 내 언어는 가난했다. 나는 뽀삐를 잃은 슬픔을 표현할 단어를 가지지 못했다. 날개짓 한 번 하지 못한 슬픔의 새들은 그대로 마음에 갇혀 나는 법을 잊어버렸다. 올바르게 해소되지 못한 슬픔은 자꾸 그 무게만 커져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본래의 형체를 잃고 마음의 일부가 되었다. 수많은 낱말이 머리 속에 떠다니는 지금도 나는 그때의 슬픔을 바닥에서 건져 올릴 단어를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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