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산책

#00. 나의 친구와 길었던 여정을 마무리하며

by Cherry Fraser
내가 방법을 조금 바꿔서,
이제는 저녁 무렵 해변을 따라 너와 함께 달릴 수 없어.
어떤 꿈결에, 그리고 네 안에서라면 모를까.
네가 잠시 꿈을 꾸면
거기서는 내가 보일 거야.

로빈슨 제퍼슨(Robinson Jefferson)의 시『집 강아지의 무덤(The House-Dog's Grave)』의 1연에서 유령 개가 인간 친구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넙죽이도 자신의 방식을 조금 바꿨다.

넙죽이와 무수히 걸었던 산책로들, 공원들, 풀밭들. 함께 걸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넙죽이가 남긴 위대한 유산들가령 금빛 털오라기라든지, 고질병이었던 피부병으로 인해 났던 지독한 체취가 남은 담요라든지, 그리고 나의 가슴에 아로새긴 모든 것들은 평생 내 삶의 지형의 일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작고 동안인 외모 덕에 길에서 사람들이 항상 '애기 지나간다~'하며 귀여워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때가 이미 20살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일요일 오전, 넙죽이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 안에서 떠났다.

23년. 넙죽이가 보내온 세월이다. 견생으로 따지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요크셔테리어의 평균 수명이 15년 정도라 알려져 있으니, 오히려 축복받았다고 해야 할까?


사후 절차는 빠르게 진행됐다. 존중과 예우를 갖춘 채 마지막 길을 최선을 다해 배웅해주었다. 나는 다음날 바로 일상으로 복귀했고, 사흘 정도 지나니 폭발할듯한 감정은 어느 정도 추스러지는 것 같았다. 이제 슬픔은 가라앉아 도처에 부드럽게 깔려있는 존재다. 하지만 넙죽이의 사진을 보거나, 다른 요키를 보거나, 강아지 모양의 구름을 쳐다보거나, 내 책장에 자리 잡고 있는 황금색 유골함을 볼 때, 함께 걸었던 산책로를 걸을 때, 또는 아무 때나 불현듯이 슬픔은 정교하고 첨예한 칼이 되어 가슴에 숙 들어온다.


반려견의 죽음을 맞이하는 반려인의 감정 단계는 다가올 상실을 감지하는 예기 애도(Anticipatory grief)를 시작으로 죽음의 순간, 깊고 강렬한 슬픔을 겪고, 사후 사별 과정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나는 예기 애도 단계가 가장 심각했다. 넙죽이가 떠나기 전 한 달 동안의 감정은 철천지 원수에게도 이런 저주는 삼갈 정도로 최악이었다. 정상적으로, 또 '어른'스럽게 사고하거나 행동하지 못하고 허우적대기만 했다. 또는 어린아이처럼 울기만 했다. 넙죽이가 죽는 순간에는 깊고 무한한 슬픔에 잠식되어 격렬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었든 반려동물과 교감을 충분히 나눈 반려인이라면 누구든지 맞이하고 싶지 않을 때가 닥쳐온 것이다.


동물을 향한 슬픔은 간명해서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향한 슬픔보다 순수하고 응축적이라고 설명한다. 동물에게는 감정의 응어리가 없다. 동물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동물을 향한 우리의 사랑처럼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슬픔만이 있을 뿐이다.

- 제시카 피어스(Jessica Pierce),『마지막 산책(The Last Walk)』의 일부.


상실의 순간을 겪고 전기처럼 강한 슬픔을 느끼는 것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추도에는 기간이나 방법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나는 긴 시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깊은 상실감과 우울감에 찌들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애도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하라면 할 수 있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하다.) 건강하고 다채로운 방법으로 넙죽이를 추억하고 애도를 표하고 싶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글을 남기는 것이다. 이 친구와 함께 해온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세세한 감정과 모든 에피소드를 전부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 자신은 이 글을 적으며 소중하고 작은 친구와 겪었던 크고 작은 추억들을 반추할 수 있으리라.

슬픔은 바다와 같다.
슬픔은 파도가 세차게 출렁이는 것처럼 밀려온다.
때로는 물이 잔잔하고 때로는 벅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수영을 배우는 것뿐이다.
-Vicki Harrison

시리즈의 제목은 원래 영원한 산책이 아닌, 'Vaya con Dios, Amigo'로 지었었다. 스페인어로 '신과 함께 가길'이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이 말의 줄임말인 'Adios'가 더욱 익숙할 것이다. 말 그대로 작별 인사이다. 나는 평소에 자고 있는 넙죽이를 보며 항상 '천사' 같다고 얘기해주었다. 넙죽이는 나에게 무엇이든 그 이상의 존재였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과 같이 사랑스럽고 이쁜 존재였다. 잠시 내 곁에서 쉬다가, 이제 넙죽이는 다시 날개를 달고 (아마 그 뾰족하게 서있는 귀가 날개가 아니었을까?) 신의 곁으로 떠났다고 생각하며 글의 제목을 지었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적절치 않은 것 같아 '영원한 산책'으로 바꿨다. 감명 깊게 읽은 펫로스 도서인『마지막 산책(The Last Walk)』에 대한 오마주이다. 마지막 산책을 넘어 그들은 기쁨과 행복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영원한 산책을 하게 될 것이다.


허클베리 핀의 아버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생전 19마리의 고양이와 3마리의 콜리를 키운 것으로 전해진다. 반려동물 덕후인 만큼 동물에 대한 여러 명언도 남겼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말은 '나는 개가 인간의 것이 아닌, 그들만의 천국에 가길 바란다.'이다. 그리고 또 미국의 코미디언 윌 로저스(Will Rogers)는 "만약 강아지들이 천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면, 나는 죽어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라고 했다. 마크 트웨인의 말과 묘하게 이어진다.


반려인들은 항상 반려동물이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너 영원한 안식과 행복이 있는 곳으로 떠난다고 묘사한다. 아마 그곳은 인간의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일 것이다.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푸른 초원과 그득한 간식들, 그리고 모습이 비슷한 네발 달린 친구들이 뒤엉켜 놀고 있을 것이다. 우리를 더 이상 볼 일은 없겠지만, 그것이 중요할까? 그들은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넙죽이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실컷 놀다가, 로빈슨의 말처럼 운이 좋아 꿈결에서 잠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 내가 늙어 죽으면,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 모습을 하고 마중을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천국이 아닌, 넙죽이가 있는 그곳으로 떠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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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기 전에는 몰랐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떠나보내는 슬픔보다 함께였을 때의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슬픔은 조금 유예한 채, 다시 넙죽이와의 행복한 추억들을 꺼내볼 것이다. 즐겁게 추억하기도 하고, 목놓아 울어주기도 하며,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도 할 테다. 차마 손을 못 댈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는 가슴속 서랍을 조금씩 정리해나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여전히 격렬히 그립고 보고 싶지만, 어지러운 서랍 위에 담요를 덮어두어 피하고 싶진 않다. 차곡차곡 정리를 마치고, 깔끔하게 정돈된 그 서랍 위에 꽃 한 송이를 올려놓는다면 우리의 추억은 비로소 완성된 상태로 영원히 내 가슴속에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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