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봄이네

by 라이테


해 질 녘 바람이 아직은 맵다. 이왕 인심 쓴 김에 봄볕을 한꺼번에 풀어놓아도 좋으련만, 계절은 늘 조심스럽다. 서두르는 법이 없다. 아주 조금씩, 매일 조금씩 볕을 늘려준다. 아침에 밟으면 서늘하던 흙이 오후가 되면 느슨해지고, 해가 길어질수록 그림자도 한 뼘씩 뒤로 물러난다.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하던 땅이 들뜨지 않도록 꼭꼭 밟아줘야 하는 보리밭의 보리들이 물기를 빨아올릴 즈음, 겨우내 잎을 좌우로 풀어헤치고 바짝 구부려 추위와 맞섰던 마늘도 툭툭 몸을 털고 긴 잎을 곧추세운다.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바람 속에, 그러나 분명히 섞여 있는 온기가 계절의 변화를 슬며시 일러준다.

아버지는 늦가을부터 비워두었던 텃밭에 거름 포대를 나르며 밭을 일굴 준비를 시작하셨다. 삽이 흙을 뒤집을 때마다 묵은 냄새와 함께 겨울 내내 눌려 있던 흙이 숨을 쉬었다. 그 냄새가 괜히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돌담 밑 양지에는 봄까치꽃이 올핸 유난히 늦었다. 푸른 잎은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꽃망울은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 길었던 탓일 것이다. 그래도 곧 피어날 것을 알기에 그 자리를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이쯤이면 냉이가 한창이었다. 봄 음식의 시작은 늘 냉이였다. 흙냄새 같으면서도 달큼하고, 맵쌀하면서도 향긋한 냉이를 한 줌 캐 오면 식탁은 금세 달라졌다. 봄동 겉절이에 들기름 바른 김, 계란부침뿐이던 저녁상에 냉잇국 하나가 올라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들깻가루를 듬뿍 넣어 끓인 냉잇국은 며칠 정성을 들인 사골국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국을 떠 입에 넣으면 입안 가득 번지는 향이 괜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듯했다. 겨우내 찬바람과 얼음 땅을 견딘 내공이 자줏빛 톱니 같은 잎사귀마다 배어 있는 듯했다. 비닐하우스에서 물을 대며 곱게 키운 미나리와는 견줄 수 없는 맛이었다. 그것은 버틴 시간만큼 깊어진 향이었고, 계절이 키워낸 맛이었다.

문득 과도 하나 챙겨 들고 냉이 많은 밭을 다녀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냉이 도둑이라며 쫓아오려나 싶어 혼자 피식 웃었다. 봄은 늘 그렇게, 슬쩍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 와 있었다.

“아, 봄이네.”

이 말은 내 어린 시절에도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해 질 녘, 들판 건너편부터 어슴푸레해지며 어둠이 밀려오고, 노을이 산산이 부서지듯 흩어지다 먼 산 너머로 넘어갈 때면 어김없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 말 속에는 추위를 잘 넘겼다는 안도와, 이제는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다짐이 함께 담겨 있었다. 가슴이 한 번 들썩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던 순간이었다.

나에게는 언니가 있었다. 나는 늘 언니를 따라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마루 끝에 앉아 발을 앞뒤로 흔들거리며 언니를 기다렸다. 골목 끝에서 언니 모습이 보이면 벌떡 일어나 달려나가곤 했다. 언니가 와야 하루가 이어졌다. 그리고 내 입에서 “아, 봄이네.” 그 말이 나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언니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봄이 왔으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이.

봄이면 농부가 밭의 검불을 모아 불을 놓고 농사를 준비하듯, 우리에게도 봄에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였다. 둘 다 채취하는 일이었다.

한 가지는 동네 앞 들판을 가로질러 탑천까지 가서 마름을 따오는 일이었다. 어린 걸음으로는 꽤 먼 거리였지만, 언니와 함께라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돌멩이를 차기도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며 발걸음을 맞췄다. 다만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면내에는 ‘개나리댁’이라 불리는 여인이 있었는데, 누더기 옷을 겹겹이 입고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봄이 시작될 즈음이면 들판을 헤집고 다녔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하굣길에 마주치면 기습적으로 놀라게 하곤 해서 우리는 그 여인을 만날까 봐 괜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탑천에 얽힌 소문도 있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아 그 원혼이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끈다는 이야기였다.

”엄마, 거기 가면 진짜 귀신이 다리 잡아당겨?“

”그러니까 가지 말라는 거지.“

어머니는 늘 그렇게만 말씀하셨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끝내 알려주지 않으셨다. 그 애매한 대답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봄 무렵의 탑천은 가운데만 물이 흐르고 가장자리는 거의 말라 있었다. 바닥은 제법 단단해 어린 우리가 걸어도 푹 꺼지지 않았다. 가장자리에는 마름풀이 자라 있었고, 말라비틀어진 줄기마다 까맣고 뾰족한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우리는 장갑도 없이 찌그러진 양은 양동이 하나를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마름을 땄다. 가시에 손이 찔리면 따끔했지만, 입으로 쭈욱 빨아내고 툭 털어버렸다. 그 정도의 아픔은 놀이의 일부였다. 누가 더 많이 따느냐 괜히 경쟁이 붙기도 했고, 서둘러 따다가 손을 더 찔리기도 했다. 그래도 양동이에 마름이 차오를수록 뿌듯했다.

다른 집에서는 마름을 깨끗이 씻어 가마솥에 쪄서 간식으로 내주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달랐다.

”거기서 난 걸 왜 자꾸 따와. 당장 갖다 버려.“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민물고기도, 마름도 예외는 없었다. 나는 그게 못마땅했다. 손이 찔려가며 힘들게 딴 것을 버리라니 억울하고 서운했다. 그래서 몰래 친구네 집에 가져다주고 거기서 찐 마름을 얻어먹곤 했다. 그때는 왜 우리 집만 그럴까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진흙 묻은 옷이며 신발을 빨아야 했던 어머니의 고단함을 알 것도 같다. 그 마음까지는 어린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나물 캐기였다.

정부양곡보관창고 옆 비탈은 햇볕이 잘 들어 냉이와 쑥, 벌금자리가 가장 먼저 자랐다. 흙은 부드럽고 물기도 적당해 나물이 잘 자랐다. 나물에는 주인이 없었다. 먼저 캐는 사람이 주인이었다.

나물 캐는 날은 늘 언니와 함께였다. 친구와 가면 경쟁이 붙어 마음이 바빠졌고, 언니와 가면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캘 수 있었다. 과도는 늘 언니 차지였고, 나는 접었다 펴는 녹슨 문구용 칼을 들고 뒤를 따랐다.

”집에 가서 다듬자“

언니는 빠르게 캐 담았고, 나는 뿌리에 묻은 흙이 싫어 하나하나 다듬느라 늘 더디기만 했다. 어느새 언니의 바구니는 가득 차 있고, 내 것은 아직 한참 비어 있었다.

봄볕은 머리와 등을 간질이며 따뜻하게 내려앉았고, 냉이 뿌리를 자를 때마다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냉이를 캐다가 기차 소리에 허리를 펴고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들었다. 기차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냉이를 캤다. 그렇게 봄날 오후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저물어갔다.

집에 돌아와 말끔히 다듬은 나물을 내놓으면 어머니는 그제야 반기셨다. 냉이와 벌금자리가 섞인 바구니는 저녁 식탁으로 이어졌다. 대파를 송송 썰어 넣은 냉잇국이 올라오면, 그날 저녁은 유난히 따뜻했다. 국 냄새가 부엌을 채우고, 식구들이 둘러앉은 상 위에는 봄이 올라와 있었다.

냉이를 캔 우리에게 따로 칭찬은 없었지만, 내가 캔 냉이로 식구들이 한 끼를 먹는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래서인지 냉잇국이 더 먹고 싶어졌다. 나는 빈 국그릇을 내밀며 말을 건넸다.

“엄마, 국 한 그릇 더 먹을래.”

“오늘 냉이 다른 날보다 많았지, 언니?”

그 말 속에는 한 가지 바람이 숨어 있었다.

오늘은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어린 마음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봄마다 캐 오던 그 냉이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작은 손으로 흙을 헤집으며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었던 마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이 함께 담겨 있었을 것이다. 식탁 위에 오른 따뜻한 냉잇국 한 그릇은 그 마음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받아주는 방식이었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계절을 나누며 봄을 지나왔다.

그리고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봄은 늘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나누던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을.


내리며 가느다란 줄기가 물 속에서 길게 자라 물 위에 뜬다. 잎은 마름모꼴의 삼각형으로 빽빽하게 나와있는데, 잎자루에는 공기가 들어 있는 주머니가 있어서 물 위에 뜰 수 있게 되어 있다. 열매는 핵과로 마름이라고 하는데, 물 속에서 아래를 향해 달리며, 2~4개의 뿔이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로 연못이나 늪 등에서 볼 수 있다. 마름모라는 도형도 여기에서 나왔다.
마름풀
마름꽃
마름열매

사진출처-블로그 미소의 향연

벌금자리(벼룩나물)
2025.03.09. 오늘 오후에 냉이캐러 가서 만난 냉이들
개쑥갓꽃
봄까치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