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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산과 두곡교와 장작불

브런치마을 입성 1년

by 라이테

지난 금요일 퇴근 후에 교우 몇 명과 함께 섬진강변으로 달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사철 우렁찬 물소리를 내는 섬진강에 물줄기를 잇대놓은 호락산 자락에 있었다.

교우 N의 시어른이 논이었던 곳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새 집 공사가 한창이던 중 소천하셨고 완공된 집은 교우가 유산으로 물려받아 세컨드하우스로 이용하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출발시간에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밤 9시를 훌쩍 넘긴 시간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두곡교를 향해 내려갔다. 난간이 따로 없는 두곡교를 건널 때 밤에도 여전할 물소리를 듣기 위해 차를 멈추었다. 음력으로 보름이 일주일 남짓이나 지났으니 이지러진 달빛은 노안으로 침침한 눈처럼 흐릿했지만 분명 거기 밤빛 닮은 강물이 흐르고 내 마음에도 설렘이 흘렀다. 올봄만 섬진강을 세 번. 이쯤이면 섬진사랑이라고 우겨도 될 성싶다.

집 뒤란이 산길로 이어진다
담장 아래 오수로에도 산에서 내려온 물이 흘러 올챙이가 꼬물거렸다

강을 건너 구불구불 가로등도 없는 길을 조심조심 올라갔다. 도착한 세컨드하우스는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진 곳에 자리 잡은 동네의 가장 끝머리 집이었다. 시골동네 흔한 개 짖는 소리도 없고 인기척은 더구나 없다.

차 안에서 간단히 김밥과 치킨 두 조각씩을 먹은 터라 다음날 필요한 식재료들을 풀어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둥근 안경테 너머 쌍꺼풀이 크게 지고 웃으면 눈꼬리에 주름이 이쁘게 지는 세컨드하우스 집주인 N은 생김만큼이나 다정했다. 집을 무료 개방해 주고 운전도 직접 해주고 딱 하나 있는 방에 2층침대를 나이 많은 두 언니 Y, K(연재소설의 은채)에게 양보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난 살짝 코를 고니까 내가 거실에서 잘게요."

주인도 아닌데 방을 차지하는 두 언니가 민망하지 않게 적당히 둘러댔다.

침구류를 꺼내 깔아주고 보일러와 전기매트를 꽂아주었다. 산속이고 더구나 밤이 되니 기온이 5도로 떨어졌다. 단톡방에 미리 고지를 했기에 모두 한 겹 씩 외투를 더 챙겼다.


야밤에 화장실 들락날락 귀찮지도 않은지 수박도매사업을 하는 맏언니 Y가 가져온 큰 수박을 호기롭게 반으로 잘랐다. 올해 첫 수박이다. 반 통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반통을 조각내었다. 입으로는 더 이상 못 먹는다 하면서도 우리가 누군가. K-아지매 아닌가. 나중에는 서로 양보하는 척 두둑한 배를 쓰다듬으며 미뤄댔다. 그럴 땐 막내가 불리하다. 그런데 우리 막내 S는 언니들 말을 호탕하게 웃으면서 잘 듣는다. 성격 좋기로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인정한 인물이다.

"자다 오줌 싸러 2층에서 내려오다 넘어지면 어쩌려고요."

별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낄낄거리며 배꼽 잡고 웃어댔다. 낯선 집이 주는 여유일까, 여학교 수학여행 같은 들뜸일까.

마지막 세 조각은 나이 적은 순으로 셋이서 하나씩 집어 들고 수박 반통을 끝장냈다. 화장실을 고려해 2층을 차지하겠다던 맏언니 Y를 1층으로 경로우대하고 은채 K는 침대 대신 거실의 전기매트를 선택했다. 나이 서열 한가운데인 나는 산자락의 작은집 2층 침대에 하룻밤 둥지를 틀었다.

집 앞 제법 큰 계곡물이 흐르는 배산임수다. 눈여겨 봐뒀다.ㅋ

캠핑인데 그냥 보낼 수는 없다고 집주인 N이 벌써 불멍을 준비했단다.

장작을 두 상자나 차에서 내렸다. 우리가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차 안에서 경상도 지역 산불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었는데 이래도 되는 건지 조금 망설여졌다. 먼저 핸드폰을 꺼내 지역의 풍속과 기온을 살폈다.

화로가 놓일 마당은 화단을 제외하고는 시멘트로 발라져 있었고 만약을 대비해 물 쓰기가 좋게 마당 한쪽에 있는 수돗가 근처로 자리를 잡고 큰 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호스(노즐)도 길게 빼놓았다.

입에서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 껴입을 만한 옷은 죄다 껴입었다. 야외용 의자를 화로 주위에 놓고 불을 붙였다. 불길이 단번에 붙지는 않았다. 불이 잘 일도록 쏘시개를 따로 써야 하는데 우격다짐으로 마른 장작에 붙이려니 제법 뜸을 들였다.

음주를 곧잘 하는 듯한 N은

"이럴 땐 맥주 한 캔이 쥑이는데. 불멍이 밍숭밍숭 하겠네." 멋쩍게 웃었다.

나머지 멤버들이 음주를 하지 않으니 혼자 마실 수는 없는 일이지. 베트남여행 때 사 온 인스턴트커피 몇 봉을 뜨거운 물에 녹여 그윽한 향으로 대신했다.

불멍 낭만 앞에 늘어만 가는 몸무게 걱정은 잠시 꺼두고 고구마와 마시멜로를 꺼냈다.

"그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오늘까지만 먹자."

다이어트 진리처럼 회자되는 그 말이 우리에겐들 예외일까. 대신 1인 1개씩 맛만 보기로 했다.

화로의 불꽃은 처음엔 춤을 추듯 이리저리 요란스럽더니 어느 정도 장작 속까지 불이 침투하면서 불꽃은 안정되고 장작은 가을 홍시 같은 빛으로 물들었다. 불빛을 받은 얼굴이 사춘기 소녀처럼 붉어졌다.

불의 혀가 잦아들면서 마른나무였던 본래 색깔을 잃고 장작은 검붉게 타들어갔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이때가 불멍 하기에도, 고구마나 고기를 굽기에도, 뜨거운 정도를 예측하고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앉기에도 딱 알맞다. 길길이 날뛰어 너무 요란하고 뜨거우면 죄다 숯검댕을 만들고 불 곁에 다가갈 수 없으니 쓸모가 없다. 장작불에도 숙성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김치가 숙성되듯 장작불이 숙성됐을 때 쓰임이 가장 요긴한 불이 된다.


밤은 자정을 향해가고 구름에 가렸던 별빛은 다시 반짝였다. 이야기 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이윽고 소쩍새 청아한 울음만 청량한 밤공기를 가르고 산동네를 휘돌았다.

산자락 과수원. 나무도 보험을 든단다. 리본이 달린 나무는 보험가입 증표란다

품 안의 젖먹이에 내어 줄 젖이 마르지 않는 어미 같은 호락산에서 비롯된 물이 곡성 두가리 세컨드하우스 바로 앞을 지나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발원지를 떠나 굽이굽이 산야를 거쳐 바다로 이동하는 동안 거쳐온 산마다 욕심 없이 실개천을 보탰기에 그 강바닥이 마르지 않고 큰 강을 이루어 바다에 닿을 수 있었다.

광양 앞바다로 흘러드는 섬진강

이달 초 벚꽃이 만발할 때 광양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섬진강을 보고 왔다. 중류에서 청년 같던 강물이 하류에 다다르면 노곤한 몸을 쉴 겨를도 없이 염도가 다른 바다와 섞이느라 몸살을 할 것이다. 미련 없이 푸지게 부려놓은 강물은 제 할 일을 다 한 양 강이라는 이름을 잃고 바다가 된다. 이를 악물고 묵묵히 첫 산고를 이겨내는 새댁이 어머니가 되는 과정과 같아서 마음이 뭉클했다. 바다가 된 강물은 이제 물고기를 살리고 배를 띄우고 소금을 내고 수분을 증발해 날씨를 조절한다. 결국 살리는 일을 한다.




작년 오늘은 브런치 스토리 작가 신청이 통과되었다고 메일을 받은 날이다. 딱 일 년이 되었다.

이 글이 100번째 글이다. 평소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데 어쩐 일인지 브런치 100번째 글을 쓰기가 많이 망설여졌다. 군입대 아들의 연재북 2탄을 오픈해야 할까. 아니면 봄꽃 놀이 갔던 남도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고민만 하다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다 결정한 것이 지난 주말의 이야기다.


1년 전 두세 분의 작가님을 구독하며 댓글만 쓰다가 '사라요'작가님의 권유로 용기를 냈다.

좌충우돌 실수도 많았고 하룻강아지처럼 촐싹거렸다. 뛰어나지 않은 필력으로 작가님들 글방에 드나들며 라이테를 알려야 했다. 지인들을 구독자로 동원하지는 못했고 가족은 라잇킷 한 번, 댓글 한 줄도 올리지 않는 라이언과 언니 딱 두 명이 구독자로 있다.


나는 3 무 작가다. 탄탄한 필력 무, 화려한 이력 무, 출간의욕 무기력이다.

하룻강아지처럼 발랄하게 이웃작가님의 글방만 누비기에 구독자 증가는 항상 제자리다. 출간의 비결 덕목 중 하나인 한 우물을 파지도 않는다. 소설도 쓰고 수필도 쓰고 가끔 시 비슷하게 쓰고 시라고 우겼다. 또 독자에게 잘 읽히는 글을 쓰지도 않고 쓰고 싶은 글을 쓴다. 그래서 더 느리다는 것을 안다. 책이 넘쳐나는 시대에 나까지 보탤게 뭐 있나 싶지만 이건 순전히 그만한 그릇이 안되기에 나 자신에게 놓는 어깃장 소리다.


글쓰기 플랫폼에서 한 방향을 향해 모두 앞으로 걷고 있는데 나는 옆으로 걷는 게와 같다. 이미 고지를 정복하고 새로운 고지를 향해 질주하는 분들도 부지기수다. 나는 옆으로 걷다 보니 걸을수록 점차 향방의 간격은 벌어지고 끝내 무리에서 이탈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스스로 위로를 좀 하자면 구독자는 적어도 점성이 상당히 끈끈하다. 브런치 스토리라는 무대 뒤에서 조용히 러브콜 하는 이웃작가님들이 종종 있다. 출간 러브콜이 아니라 교제 러브콜이다. 그래서 동생들이 생겼고 언니 같은 친구도 생겼다. 기회가 되면 서로 만나자고 한다. 베트남 마틸다 하나씨 작가님이나 서울의 아헤브작가님처럼 만남이야기를 글로 공개하기도 하셨고 공개는 안 하셨지만 지속적으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꽃 천지라서 요즘은 이쁜 꽃사진을 주로 주고받는다. 오늘도 북쪽 사는 친구가 모란꽃이 핀 정원자랑을 했다. 그렇게 우정을 나눈다.

야물고 다정한 고향동생 새벽소리 작가님 상하이 풍경
아침부터 풀 뽑은 우리 세젤예 지랖동생 세컨드하우스 정원
층간소음 서터레스 올 땐 풍선불기(그사이 작가님네 비누 아님 주의.) 우울감 없앨땐 껌씹기
추운 겨울 보낸 북쪽 모란이라 더 이쁜가 꿀벌이 끊이지 않네~ㅋ
보내온 사진들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려면 빈자리를 남겨두어야 한다. 내 글방은 헐렁헐렁해서 여백이 많다. 누구라도 노크를 할 수 있고 누구라도 들어올 공간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시간과 관심을 내어놓지 않으면 허름한 글방일지라도 문을 열기는 어렵다.

집 짓기가 그렇듯 글방도 혼자서는 안 될 일이다. 일 년을 머물게 해 주신 이웃작가님들과 구독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욕심을 버리고 실개천을 내어 준 이름대로 호락호락한 호락산,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바다를 향해 흐르는 두곡교 밑의 푸른 섬진강, 화려한 불의 혀를 잠재우고 적당한 열기를 유지하는 숯이 된 장작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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