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오랫동안 사는 게 힘겨웠다. 동굴로 숨어들었다.
바람막이가 될 줄 알았던 동굴까지도 폭풍이 들이쳤고 춥고 미끄럽고 거칠었다. 숨어있던 박쥐들이 푸드덕 날아오르는 이벤트는 끊이지 않았다. 놀라 지르는 비명은 울림이 되어 더 크게 나를 뒤덮었다. 그럼에도 동굴에서 나올 수 없었다. 세상은 광명한 빛으로 눈부셨고 나는 세상이 무서웠다.
아팠다. 내 등을 사정없이 밀어냈던 삶. 균열이 점차 틈이 되고 벌어진 틈은 수렁이 되었다. 기를 쓰고 발버둥 칠수록 나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고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진흙 수렁이 나를 삼키려 할 때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제 끝이 오는구나.
나를 보여주기 싫었다. 그림자조차도 감추고 싶었다. 이 땅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세상에 내뿜는 내 날숨을 저주했다.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끊어냈다. 동창들과 선후배, 사회초년생 때 직장 동료, 아파트 이웃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죽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유혹을 했다. 뒷걸음질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세상이 싫었다. 그러나 죽을힘이 없었다. 죽을 수 없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도 가족이었고 내가 살아야 할 이유도 가족이었다.
아기를 등에 업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눈물 콧물범벅으로 찾은 작은 예배당 끝자리에서 빛을 만났다. 바람(프뉴마)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양 옆에 두 아이를 끼고 그곳에서 안도의 숨을 쉬었다. 동굴 속에서도 두 아이는 자랐다. 빛과 바람이 있다 해서 상황이 급 반전하지는 않았다. 많은 결핍은 우리를 불안하게 했다. 이렇게 키우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는데. 이 말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지만 입을 앙다물고 버텼다.
열이 펄펄 끓는 아들을 둘러업고 잠이 덜 깨 칭얼대며 걷는 딸 손을 움켜쥐고 응급실 대신 예배당에 주저앉았다. 그런 날은 유난히 샛별이 희게 반짝였다. 그저 울고 또 우는 일이 살 길이었다.
그 시절이 다 지났다. 네 식구는 셋으로 바뀌었고 두 아이는 청년이, 마침내 죽지 못한 엄마는 투박한 중년이 되었다. 동굴에서 자란 아이들이 이제는 그 새벽길을 눈물 없이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살린 것은 빛이며 바람(프뉴마)되시는 분과 내 원가족이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오직 나를 만드신 창조주다.
작년 가을에야 내 MBTI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 도무지 16개의 유형에 나라는 존재를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나를 나도 잘 모르겠는 걸 정형화된 틀에 욱여넣고 " 이것이 나야."하고 몇 가지 특성으로 요약하는 게 마뜩잖았다. 오묘하고 놀라운 신비를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문장으로 전환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MBTI라는 끈으로 묶어서 사고의 흐름을 부정적인 단어로 옭아매고 싶지 않은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결국 친구의 가벼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하릴없이 나도 끼어들었다. 예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ISFJ다. 이것도 외우지 못해서 메모장에 기록해 놓고 물어보면 그때마다 확인한다. 이만큼 관심이 없다. 내 MBTI 파악도 어려운데 하물며 타인이야. (그러니 저랑 MBTI로 티키타카는 불통이라 생각하시길요)
이 연재북에 라이테를 담고 싶었다. 내 글은 어느 대목에서든 글 쓴 이를 담고 있지만 특히 이 책은 나를 감싸는 배냇저고리이며 실루엣이기도 하다. 한 줄로 꿰기에는 구색이 맞지 않는 울퉁불퉁 제각각의 이야기들이 마치 손질하지 않은 탱자나무 울타리 같다. 비가 잦았던 초가을에 시작해서 매운 겨울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한 동안 쉬고 오느라 늦어졌다. 이제 섣부른 봄맞이를 위해 연재북을 덮는다. 글 소재나 매끄럽지 못한 문장 탓에 혹여 탱자나무 가시에 찔렸다면 용서하시기 바란다. 당분간 새 연재북은 없고 기존 매거진 사이를 누비려고 한다.
내 슬픔과 쓸쓸함은 약함이 아니라 오래 버텨온 궤적이다. 쓸쓸함은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와 같다. 세월의 주름이 깊어질수록 소금기둥으로 견고해져 간다. 희열이 밀려와 희석시킬지라도 흔적 없이 지울 수는 없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이렇게 울고 웃으며 느끼고 살아간다. 나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덧)
대문사진은 필리핀 파나이섬 일로일로시티 비전트립 때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제 정체성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