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연세에 비해 건강하시다. 어르신들 건강 장담할 수 없다지만 어쨌든 현재 급박한 상태를 야기하는 질환은 없다.
그런데 장애인복지카드는 있다.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어서다. 신체적인 약점이 있는데 안질환이다. 드라마 더글로리 전재준처럼 정도가 심한 적록색약에다 녹내장으로 한쪽 시력을 거의 상실하셨고한쪽도 진행 중이다. 그래서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색약은 유전질환이다. 우리 세 자매가 각각 아들을 낳아 아버지는 외손자가 세 명 있는데 여동생 아들을 제외한 두 손자가 색약이다. 그중둘째 딸 아들은 현재 예비장교(ROTC. 내년 3월 임관예정)이다. 그런데 예비장교와 군장학생 선발과정신체검사에서 색약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두 군데 고양과 함평육군병원 검사를 거치고 겪은 에피소드는 지금 생각만 해도 진땀 난다.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셨다. 병과 선택에 제약은 있으나 통과되었다.
물려받은 가족력을 어쩌겠나.
문제는 아버지의 녹내장이다. 한쪽 시력을 거의 상실하셨으니 일상이 불편하실 거다. 둘째 딸은 짐작만 할 뿐 얼마나 불편하신지는 잘 모른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눈 때문에 불편하시다는 푸념을 한 번도 안 하셨다. 아버지 눈이 그 지경이 되기까지 자식들은 뭘 했나 생각해 봤다.
변명을 하자면 무던하신 아버지의 질병에 대한 태도. 그 당시에는 말씀하시지 않으면 아버지 건강에 대해 잘 살피지 못했던, 각자 자식 키우느라 바빴던 우리 남매의 무관심과 무지 정도.
아버지는 정말 무던하시다. 엄마와는 완전 정말 다르다. 엄마 건강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으나 여기서는 아버지가 주인공이니까.
아버지의 눈 질환이 이 상태로 진행될 당시는 우리 모두 아무도 몰랐다. 말씀을 안 하시다가 때를 놓친 것 같다. 우리 4남매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은 때. 때 놓친 걸 몹시 후회했고 죄송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다. 병원도 혼자 다니시고 간단한 수술 같은 건 자식에게 잘 알리지 않는다.
적록색약이 있는 데다 한쪽 눈이 실명상태다보니 고추농사가 힘들다. 텃밭에 고추를 심어도 붉게 익은 고추를 가려서 따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불편하시단 말씀 한마디 없다.
그 눈으로 텃밭도 일구시고 실버일자리에도 참여하시고 자전거도 타신다.
이런 아버지의유람에 빠지지 않는 소품이 있으니 바로 색안경. 아버지의 색안경은 알이 까매서 안경주인의 눈이 유리알 밖에서는 잘 안 보여야 대접을 받는다. 칼 라거펠트가 살아 돌아와서 디자인한다 해도 지중해의 초저녁 밤같이 연하게 그러데이션 한 세상을 비춰준다면 탈락이다.
아버지 유람에서 제외된다.
아버지 색안경은 햇살이 찬란한 계절에 덕을 톡톡히 본다. 봄부터 가을까지 아버지 유람을 책임지는 잇템이다. 둘째 딸은 유람에 빠져도 색안경은 결코 빠질 수 없다.
아버지의 세상에 우중충한 겨울 같은 것은 없었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손발이 차가워서 아버지의 겨울이 힘든데 색안경을 끼고 유람할 수 없는 계절이니 그렇다.
아버지의 색안경으로 바라본 풍경은 어떨까?
굳이 색안경 아니라도 한 쪽 눈은 실명이고 반대쪽 눈도 녹내장이 진행 중이다.
이런 찬란한 날의 풍경을 이중으로 차단시키고 바라봐야 하는 서글픔.
그런 비애가 있을듯한데 아버지의 무던함은 여기서도 작용을 해서 비애 따위는 싹도 못 트게 긍정레이저로 태워버리신다.
"타고나기를 그리 타고났는디 어쩌겄냐."
기술이 발달하여 색약을 보완하는 렌즈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해도 조물주께서 만들어 내보내신 본연의 눈을 어찌 따라갈까?
심청이처럼 임당수에 몸을 던져 아버지 눈을 밝혀드릴 수도 없고 더 침침해지는 아버지의 세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시력 잃은 눈을 아버지는 찬란한 세상에 내놓지 않으려고 색안경으로 가리시지만 눈이 더 나빠지게 되더라도 아버지 그 눈을 둘째 딸은 사랑한다.
외할아버지 닮아서 둘째 외손자의 선택사항이 좁아지더라도 나는 내 아버지의 눈을 애정한다.
외할아버지의 눈으로 보는 세상, 외손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적록색약의 세상.
두 조손 사이에 흐르는 가족력이 불평과 원망이 아닌 공감과 배려의 세상으로 빛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못된 둘째 딸은 아버지 색안경을 한 개도 안 사드렸다. 색안경 한 개도 안 사드리면서 공짜로 글감을 얻다니 못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