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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May 18. 2024

자연주의  농부님 나무들

심어 놓으면 저절로 크는 거 아니었나?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지 않다. 낙천적이다.  고모님 세 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100세가 넘으신 큰 고모님을 비롯 모두 장수하시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보아온 바로는 서둘러서 일을 그르친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성질 급한 엄마 때문에 두 분이 다투신 적은 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오래 기다리시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나무다.

아버지의 울 안에는 사과나무, 귤나무, 대추나무, 매실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감나무, 포도나무가 거쳐갔다.

지금 쫓겨나지 않은 나무는 늙은 감나무와 대봉시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다. 아, 반토막난 사과나무와 올봄 삽목한  무화과나무도 있다.




아버지는 나무농사에 별 재미를 못 보셨다.

대추나무만 해도 그렇다.  대문 들어서자마자

한 그루가 있었다. 이 나무는 오래된 나무다. 그런데 갈수록 꽃이  피어야 할 가지에 꽃은 안 피고 자잘한 잎만 무성하게 돋아있다. 그러니 열매가 없다. 한두 가지에서 점차 번져나간다. 검색해 보니 빗자루병(오갈병)이 들었다.

이러면 대책 없이 잘라야 한다. 그런데 살아있는 나무를 잘라내는  것도 참 곤혹스럽다.


한 번은 내가 시골에 간 날 10년 넘은 돌감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작아서 씨를 발라내면 먹을 게 없다고 막내 사위를 시켜 자르게 하셨다.

미안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계속 나무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프겠다를 중얼거렸다.


그 뒤로 신품종 대추알이 큰 것으로 두 그루를 더 심으셨다. 그런데 그중 한 그루가 자꾸 열매가 익기도 전에 말라비틀어져 떨어진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따서 한 입 베어 물면 속이 썩어 푸석거린다. 따서 햇볕에 잘 말린 대추는 쭈글거려도 맛있지만 병들어 푸석거리는 대추는 그 자리에서 따 먹어도 병맛이다.


일단 한 번 병든 나무는 아버지 손에서 살아나지 못한다. 치료하고 약을 주고 하여 살리지 않는다. 살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무조건 베어낸다. 그 편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하시는 듯하다.

이제 뒤꼍에 한 그루 남았다. 너마저 그럼 안 되겠지. 아버지의 대추나무 농사는 불합격이다.

5월 15일 뒤곁 대추나무


포도나무는 몇 년 사이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겨울엔 춥다고 옷도 입혀주신다. 창고지붕으로 넝쿨이 올라타도록 줄도 쳐주시고 여간 품을 들이시는 게 아니다.

거름도 듬뿍. 각종 허드레 채소는 잘라서 포도나무 거름으로 쓰인다.

그만큼 열매도 많이 열린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열매가 어느 정도 자라면 더 이상 알이 굵어지지 않는다. 시중에 아기 눈동자처럼 새까만 포도상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여전히 갈색을 포기 못하고 쉽게 검보라색이 안 난다.

전문가들만의 비법이 분명 따로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포도가 농익지 않고 젊음을 오래 유지하는 비법은 무농약  유기농이기 때문일 것이다.

열매가 열린 후에는 솎아주기도 없고 그냥 알아서 크라고 그대로 놔두신다. 자연주의 농법이다.

열매들은 자연주의 농부처럼 정직해서 그대로 나무에 매달린 채 서리 맞을 때까지  있다.

그래도 햇빛 좋은 쪽은 가끔 농부의 수고를 알아주어 제법 달달한 열매를 내놓기도 한다.

그럴 땐 거두어서 포도잼을 만든다.

정직한 맛보다는 가미한 맛이 낫지.

농부는 자연주의여도  그 딸은 자연주의가 아니다.

5월 15일 포도열매  / 포도잼 / 작년 가을 포도


사과나무는 이사를 많이 했다. 처음엔 오빠가 여린 나무를 화분에 심어 거실에 두고 애지중지했다. 화분에서 제법 자라니 실내에 두고 볼 수 없어서 현관 앞  화단 귀퉁이에 옮겨 심었다.

기특하게도 쑥쑥 잘 자라서 봄이면 새하얀 이쁜 사과꽃도 보여주고 여름엔 앙증맞은 열매로 눈길을 끌었다. 이번엔 농부님께서  가지치기도 해주시고 사과열매도 솎아주는 최애나무로 격상했다.

9월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마지막 잎새처럼 잘 버텼다.

그래, 올 가을엔 네가 아버지의 간식거리로 몫을 톡톡히 하겠구나 기대했다.

그런데 10월쯤 되니 익어가면서 사과 겉면이 썩어간다. 처음엔 한 개, 두 개, 그러더니 온 열매가 그렇다. 채 익기도 전에 썩어 떨어진다.

내년엔 안 그러겠지 하고 두고 봐도 마찬가지.

북풍 때문에 그런가 싶어 자리를 옮겨 심어도 마찬가지. 푸른빛이 채 가시기도 전에 떨어질 것 같으니 모조리 다 딴다. 대바구니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녀도 누구 하나 손대지 않는다.

단맛은 없고 떫고 씁쓰름하다.

원인이 뭘까? 자연주의 농법??

오늘 가보니 싹둑 잘라져서 무섭게 남아있다.

사람이고 나무고 쓸모없으면 이리되나?

그래도 빌붙어 있어 보자 사과나무야.

사과나무에  냉정한 자연주의 농부님.

5월 15일.  잘린 사과나무


감나무는 대봉과 토종단감 두 그루가 있다.

토종단감은 막내고모님이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 가시면서 열매가 너무 좋아서 그냥 두기 아깝다고 캐와서 심어놓은 것이다.

30년이 넘었으니 늙은 나무다.  그래서 이제는 열매가 거의 없다. 몇 년 동안 열매를 못 먹었다.

한창 물오를 때는 인기가 많았다. 토종이라 감 껍질을 깎아내면 세로로 검은 줄이 많이 나 있다.

모양도 납작하거나 뾰족하지 않고 둥글둥글 아기얼굴처럼 이쁘다.

 시중에 이런 감 구하기 쉽지 않다.

열매가 없어도 냉정한 농부님이 자르지 않는 이유가 있다. 대문간에 있으니 여름에 그늘을 잘 만들어 준다. 대문간 앞에서 채소 다듬거나 마늘 엮거나 할 때 그늘이 딱 좋다.

열매까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뒤꼍 대추나무 옆에는 대봉시 나무가 있다. 뒤꼍이 그늘져서 쑥쑥 자라지는 않아도 제법 열매도 많고 또 열매도 크다. 맛도 좋다.  노란 두부판에 줄지어 들어앉아서 익는 대로  아버지의 달달한 겨울을 책임지는 녀석이다. 아버지의 뜰 안에서 대봉시가 가장 효자노릇 한다.

이 녀석은 또 한 가지 임무를 맡았는데 뒤꼍 담장이 자꾸 바깥으로 기울어져  담장 지지대 역할을 한다. 담장과 감나무를 넓은 탄력줄로 묶어놓았다. 서로를 잡아당기며 대치중이다.

5월 15일 대봉시나무


무화과나무는 올봄에 삽목 했다.

이 나무는 선물로 받은 것이다. 작년 봄에 화분에 삽목 하신 것을 군산에 사시는 지인 목사님께서 선물로 주셨었다. 베란다에 두고 정성을 들여도 일 년 동안 별로 자라지 않아서 아버지 마당으로 옮겨 심었다.

심고 나서 비가 며칠 내려 몸살이 적어 다행이다.

아직 어린 이 나무가 언제 자라서 무화과 열매를 낼지는 모르겠다.

5월 초 무화과나무

그동안 농부님은 또 어떤 나무를 자르고 어떤 나무를 심으실지...

아버지가 열매에 진심이신 그 마음은 무엇일까? 아마도 아버지가 나무보다 더 빨리 가시더라도 남은 자손을 위한 일일 것이다. 아들과 딸, 손주와 미래에 태어날 증손까지.

이제는 어지간한 나무라면 이대로 함께 아버지 뜰 안에 머물면 좋겠다. 아버지도 연세가 많으시니 더 좋은 열매를 바라시고 참지 못하여 나무를 자르는 그런 일은 이제 안 하셨으면 한다. 

베어내는 일보다는 열매가 없더라도 지금 나무랑 화합하는 자연주의 농부님이 되자고 권유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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