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를 마치고 난 논에서는 자리잡지 못하고 말라버린 모를 다시 교체하는 이른바 '모때우기' 작업을 하고 밭일도 끊임없이 거두고 뿌리는 작업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그렇다 보니 부모님의 귀가가 늦어졌다.
본업은 따로있고 부캐가 농부인 아버지는 본업을 마치고 나면 부캐로 돌아가 어두워질 때까지 논에 계시거나 무시무시한 공동묘지구역으로 가셔서 밭일을 더 하셨다. 마루 끝에 백열등이 켜지고 날벌레들이 백열등으로 날아드는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두워질 때까지 일하시는 엄마가 귀가하시려면 아직 멀었고 배는 고프기 마련. 집에 있어봤자 엄마도 안 계시고 부엌 찬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간식으로 먹을만한 게 없다. 찐 감자라도 간식거리가 있으면 누구든 먼저 찾아내는 게 임자.
학교에서 집까지 먼 길을 걸어왔지만 반겨주는 건 똥개 흰둥이뿐.
허전한 마음과 출출한 배를 뭐라도 먹어서 채우려면 최후의 보루 미숫가루와 설탕을 꺼낸다. 깊은 도르래 우물물을 길어 올려 첫 번째 물을 버리고 두 번째 물을 길어 올렸다가 양푼에 채운다. 그리고 미숫가루와 설탕을 어른 밥숟가락으로 크게 떠서 물에 넣어 마구 휘젓는다. 갈증 난 목에 한 사발 들이킨다. 하교 후 엄마 없는 집에서 우리는 그랬다. 그게 우리가 늦게 까지 놀이에 빠져 뛰놀 수 있는 원기보충이었다.
아침 밥상에서 엄마가 우리에게 하교 후 해야 할 일들을 줄줄 읊어주셨다.
"학교 끝나고 오면 숙제부터 하고 **(2대 독자 우리 오빠)이는 마당을 쓸고 $$(살림밑천 큰딸)이는 설거지랑 쌀 씻어놓고 빨래 걷고 ##이는 청소하고..." 줄줄이 우리 4남매의 미션이 주어진다.
우리는 첫 번째 미션은 대부분 잘 수행한다. 숙제 미션이 거의 끝날 때쯤 친구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 놀자." 그러면 급하게 숙제를 마무리하거나 하던 숙제를 그대로 둔 채 친구의 부름에 이끌려 간다.
놀이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더운 줄도 모른다. 우리의 귀가도 늦어졌으니 집을 지키는 것은 하다만 숙제와 어질러진 집안일과 똥개 흰둥이뿐이다.
우리 동네는 서울에서 남도로 이어진 철길이 동네 옆을 통과하여 동네 앞 너른 벌판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동네 근처 간이역을 통과한 남도행 기차는 다음 역에서 호남선과 전라선으로 나뉜다. 그렇기 때문에 기차운행이 적지는 않았다. 우리 집은 이 기찻길에서 100미터쯤 떨어져 있다. 기찻길과 우리 집 사이에는 두 집이 있고 세 번째가 우리 집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기차소리를 듣고 자랐고 기차가 지날 때면 땅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방음벽도 건널목 차단기도 없던 때이다. 그러니 호기심 많은 우리에게 철길은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이 위험한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동네 어른 어느 누구도 나무라거나 하지 않았다. 철길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마당이나 골목길 같은 삶의 한 공간이었다. 어른들은 이 철길 건널목을 건너 소달구지나 경운기를 끌고 논에 나갔고 머리에 점심밥이나 새참을 이고 날랐다. 그러니 누구도 위험하다고 철길에서 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떨 땐 동전을 철길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기를 기다리기도 했고 멀리 굽어진 들판 건너 시내 쪽 동네에 기차가 보이면 철길에 귀를 대어 보기도 하며 위험천만한 놀이를 했다.
시골에서 놀이야 계절에 따라 자연환경을 이용한 놀이가 주를 이루는데 초여름 놀이에서 단연 으뜸은 숨바꼭질이었다. 이 철길 바로 옆은 동네 개울로 이어지는 생활오폐수가 지나가는 도랑이 있다. 도랑이라지만 거의 말라서 땅이 축축한 정도였다. 여름이면 철길과 도랑 사이에는 족제비싸리나무로 우거졌다. 이곳이 바로 우리들의 숨바꼭질 무대다.
족제비싸리나무가 우거져서 그곳을 파헤치고 들어가 있으면 밖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빽빽한 나무 때문에 그늘이 져서 그곳에 있으면 서늘하다. 숨바꼭질이 아니어도 심심할 땐 숨기 안성맞춤인 그곳에 들어가서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덥기도 하고 놀이에 피곤한 몸을 기대고 있으면 그렇게 포근할 수 없었다.
우리가 엄마에게 매를 맞고 집을 쫓겨난 사건이 있었으니 이곳과 관련되었다.
평소엔 꼭 숙제를 먼저 하고 놀았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우리 모두가 숙제를 하지 않고 책가방만 마루에 던져놓고 바로 놀러 나갔나 보다. 아마도 언니 오빠 놀이에 끼려고 정신없이 따라나선 것 같다. 숨바꼭질도 또래들보다 언니 오빠 놀이에 껴서 하면 더 재미있다. 언니 오빠들과 놀이가 얼마나 스릴이 있냔 말이다. 망아지처럼 날뛰는 그들의 놀이를 보고 있으면 속이 다 시원할 정도인데 거기에 무리 져서 함께 논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지.
안 끼워 주겠다는 걸 졸졸졸 따라다니며 졸라댔다. 그네들은 동생들과 함께 놀아서 좋을 게 없다. 행여 함께 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내 책임이요, 거친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놀다가 비위짱이 틀어지면 삐져서 지난 흑역사를 엄마에게 일러바치는 일이 생긴다. 그러니 동생들이란 정말 놀이에 귀찮은 존재이다.
안 끼워주면 엄마한테 이를 거야를 연발하며 졸졸 따라다니니 어쩔 수 없이 숨바꼭질에 끼워주었다.
동생들은 술래를 안 시킨다. 왜냐하면 동생들 술래를 시키면 행동이 빠르지 않으니 숨은 사람을 찾아내느라 한 참 걸려서 놀이가 거의 중단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심 쓰는 것 같지만 답답하니 그런 것이지. 동생들 입장에서는 술래를 안 시키니 맘껏 숨으면 된다. 숨어도 안 찾는다. 찾아봤자 술래를 못 시키니까.
우리의 요새는 바로 족제비싸리나무속. 여기 숨으면 우거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숨어서 술래가 숨은 사람을 찾느라 전전긍긍하는 것을 재미있게 보기만 하면 된다. 더구나 토굴 속에 있는 듯 서늘하니 딱 좋다.
그날도 요새에 안심하고 숨었다. 술래가 바뀌어가면서 숨바꼭질이 계속되었다. 족제비싸리나무 그늘 속에 숨어있다가 피곤하고 서늘하니 잠이 솔솔 왔다. 처음엔 술래를 좇아 시선이 움직였지만 어느새 해저무는 고운 색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자꾸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내가 숨어서 나오지 않아도 아무도 찾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어있겠거니, 놀다가 집에 갔겠거니 했나 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초저녁 잠이 많아서 엄마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먼저 잠든 적이 수도 없이 많다. 또 나를 깨우는구나. 밥 먹고 자라고 깨우나 보다 하면서 눈을 떴다. 그런데 눈앞에는 칠흑 같은 밤하늘만 보였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기억을 더듬어봤다.
숨바꼭질하다가 잠들어버린 게 생각났다. 언니 오빠가 울면서 나를 찾아다니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엄마의 찰진 욕소리도 들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벌떡 일어나 언니를 불렀다.
언니는 눈물 콧물 흘리며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우리가 모두 숙제도 안 하고 놀았다는 것. 게다가 아침에 엄마가 준 미션을 4남매 모두가 한 개도 안 했다는 것. 내가 사라져서 저녁밥도 모두 못 먹고 찾으러 다닌 것. 하나 더, 우리 집 성난 사자 엄마가 대단히 화가 많이 나서 언니 오빠만 1차로 매타작을 이미 끝냈다는 것. 집에 들어가면 2차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
눈앞이 캄캄했다. 이미 해가 져서 캄캄했지. 그런데 진짜 눈앞에 별이 반짝이는 2차전이 기다리고 있다니.
조심스럽게 언니에게 물었다.
"아빠는?" 아빠는 아직 안 오셨단다. 아빠가 안 오셨다는 것은 다행이 아니라 큰 일이다.
우리는 2차전을 끝내고 집을 쫓겨나 대문간에 나란히 앉아있게 될 3차전까지 예상해야 했다. 3차전의 방패막인 아빠가 아직 안 오셨으니.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깜깜해도 우리 집 방향은 어딘지 잘 알 수 있었다. 날뛰는 사자의 포효가 온 동네를 들썩들썩하게 했으니 소리 나는 쪽으로 가면 우리 집인 것이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2차전을 간신히 끝내고 우리는 아빠 없이 3차전을 맞이했다. 엄마는 2차전 병기 회초리를 던지고 서둘러 밤이슬로 눅눅해져가는 빨래를 걷고 우리의 저녁밥을 준비하셨다. 우리 4남매는 대문간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말이 없었다. 피곤하고 배고프고 졸렸으니. 귀만 쫑긋 세우고 아빠의 자전거 소리가 들리는지 작은 기척에도 소리 나는 쪽을 민감하게 바라보았다.
드디어 아빠의 자전거 소리가 들린다. 이젠 됐다. 아빠 뒤를 따라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아빠는 쪼그리고 앉아있는 우리 4남매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들어가자." 한마디를 눈으로 말씀하신다.
아빠뒤를 따라 살금살금 마당으로 들어서는 우리 남매. 엄마의 분노는 아빠를 보자마자 다시 후폭풍으로 우리의 활약상을 폭로하며
"애들을 안 때리니까 저렇지"
라는 말로 4차전 개막을 종용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히어로 아빠는 엄마 말에도 묵묵부답. 우리를 향해 "어서 밥 먹고 숙제해라." 이 말씀으로 엄마의 가라앉은 속을 다시 뒤집는 센스. 이걸로 4차전은 무산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말로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신 분이다. 그러나 말이 아닌 마음으로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엄마와는 반대로 단 한 번도 아버지는 욕이나 저주나 비난의 말을 내뱉은 적이 없다. 지금 정서로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땐 지난한 생활의 고단함을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풀어내는 집이 적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점잖은 분이 내 아버지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세월을 잘못 만나서 배움도 중졸로 짧고 홀어머니 밑 금지옥엽 외아들이어서 너른 세상을 향해 고향을 떠날 수도 없었던 우리 아버지.
이제 그 세월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내년이면 米壽인 아버지.
어두운 밤 대문간 담벼락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있는 우리의 길라잡이를 해주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흐르는 시간을 지금이라도 붙잡아 둘 수는 없을까. 굽어진 등과 가늘어진 팔다리로 여전히 우리 4남매를 길라잡이 해주시면 좋겠다. 그날 백열등이 환한 마당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서신 것처럼.
그날의 족제비싸리나무처럼 덥고 피곤하고 무료한 저물녘의 나를 언제까지 폭 감싸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