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대문 앞에는 큰 트럭 한 대 정도 지나다닐 폭의 골목이 있다. 그 골목 맞은편에 넓은 밭이 있었는데 이 밭의 주인은 밭 근처에 사는 청각장애인 부부이다.
아마도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부부 중 남편 되는 분 어머니도 청각장애, 딸도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이 가족의 의사소통에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나. 그럼에도 동네 어느 누구도 이들의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여 이들과 함께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가끔 우편물이나 고지서 같은 용지를 들고 내 아버지를 찾는 때가 종종 있었다. 어린 우리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어른들은 어찌 그리 알아듣고 문제를 해결해서 돌아가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일이 없는 한가한 날이면 아버지는 막걸리를 두어 병 준비하시고는 우리에게 그 댁에 가서 아저씨를 불러오라 신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시면서 농사에 대해 얘기를 나누시는 것 같다. 두 분이 서로 다른 나라 언어로 얘기하시는 듯하는데도 대화가 진행되었다.
우리가 어릴 때 주로 보리와 콩이 이 밭에서 자랐다.
초여름이 되면 보리가 누렇게 익어간다. 숨바꼭질 놀이를 매일 빠지지 않고 했던 우리가 몸을 숨길 장소로 가리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철도 밑 족제비싸리나무 우거진 곳이나 이 보리밭이나 매한가지였다.
보리가 자라고 이삭이 익어갈 쯤이면 고랑이나 이랑의 구분이 전혀 되지 않을 만큼 밭 전체가 빽빽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보릿대를 헤치고 사이로 숨어든다. 밭이 넓어서 어느 곳에 숨어들었는지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땅에 얼굴이 닿을 만큼 납작 엎드려 키득거리고 있자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이 꾸러기들. 식량으로 쓰려고 농사한 보리밭을 놀이터로 만들어 버리다니. 술래는 보리이삭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정도를 잘 보고 있어야 한다. 술래를 피해 숨었다가 키득거리는 웃음이 몸에 진동으로 커지고 보릿대가 유난히 더 흔들리는 그곳을 찾으면 어김없이 거기 다음 술래가 엎드려 있다.
놀이에 한참 빠져있던 우리는 보리밭이 엉망이 되어가는 것도 모르고 가까이 다가오는 술래를 피해 다른 곳으로 달아난다. 이미 이랑과 고랑의 경계가 모호한 보리밭을 고랑으로 골라서 뛸 리가 없다. 보리밭이 어린 꾸러기들 발자국으로 난리다. 보리는 이리저리 쓰러지고 꾸러기들 웃음소리는 동네를 울린다.
이쯤 되면 보리밭 근처에 살던 밭주인이 나와보기도 하련만 청각장애를 갖고 있으니 보리밭이 망가지는 줄을 모른다. 나중에 근처를 지나가는 어른들의 호통소리에 우리 놀이공간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우리의 보리밭 만행은 그날 저녁 각자 집에서 회초리나 꾸지람의 구실이 되어 응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과 몸살을 하고도 보리는 다행히 추수 때까지 잘 버텨주었다.
보리 추수가 끝나고 나면 우리가 하는 일이 있었으니 보리밭을 샅샅이 뒤지는 것이었다.
보리밭에는 우리들의 입을 심심하지 않게 해주는 좋은 야생풀이 있었는데 까마중과 꽈리였다.
유난히 보리밭에 까마중이 잘 자랐다. 까맣게 익은 앙증맞은 까마중 열매는 아린맛과 달콤함을 동시에 주었는데 밥은 굶지 않았어도 간식이 늘 고팠던 우리에게 별미였다. 한 고랑씩 타고서 밭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까맣게 익은 까마중 열매를 찾는다. 쭉 걸어가다 한 곳에 오래 머문다 싶으면 틀림없이 까마중 열매가 거기 있다. 누가 먹을세라 찾는 즉시 그 자리에서 따먹어야 한다. "여기 찾았다." 말하면 재빠른 손길들이 순식간에 낚아채간다. 빠르기가 히말라야 솔개만큼은 될 것이다.
까마중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은 꽈리다. 꽈리는 동글동글 모양도 색도 얼마나 이쁜지 모른다. 잠자리 날개같은 얇은 겉싸개옷을 입은 꽈리가 익었는지는 꽈리를 감싸고 있는 오각형모양의 겉싸개 색깔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색깔이 베이지색이면 분명 안에 연주황으로 익은 꽈리가 들어있고 초록이면 안에 초록색 탱탱한 익지 않은 열매가 들어있다.
익은 열매는 방울토마토처럼 속에 작은 씨앗들이 들어있고 맛도 비슷하다. 까마중 열매보다 훨씬 크기가 커서 씹는 맛도 있다. 익지 않은 꽈리는 발견한 장소가 어디인지 기억해 두었다가 그때부터 매일 문안을 여쭌다. 잘 익어가냐고 언제 익을 거냐고. 그러다가 먹을만하게 익으면 그땐 벌써 누군가의 재빠른 손이 따내고 없다.
까마중도 꽈리도 마땅하지 않으면 보리 이삭을 줍는다. 알뜰한 보리밭주인께서 이미 이삭 줍기를 하셔서 남은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흘리신 보리 이삭이 있다. 그걸로 보리이삭 굽기를 한다. 이삭 굽기는 먹기 위한 것보다는 놀이다.
언니, 오빠가 이삭을 모아놓는 사이 불을 지필만한 신문지나 밀가루포대 한 귀퉁이를 쭉 찢어온다. 부엌에서 사각성냥을 가져오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막내나 내 역할이다.
종이에 먼저 불을 붙이고 불이 좀 살라지면 마른 풀이나 보릿대를 잘라서 더 넣는다. 불이 안정적으로 타오르면 그때 보리 이삭을 올린다. 그런데 불이 일정하지 않으니 보리 이삭이 새까맣게 타버리거나 익지 않거나 한다. 한 번도 제대로 익은 보리 이삭을 먹어보지 못했다.
간혹 어린 우리 눈에도 보리가 먹기 좋게 익었다 싶으면 오빠가
" 익었는지 봐야는데 뜨거우니까 내가 먼저 먹어본다." 하면서 호호 불어서 입에 냉큼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음~~ 이건 익었네." 한다.
그러면 다음에 구워진 이삭이 제대로 먹을만하게 익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결국 입 주위만 새까맣게 깜장이 묻고 조바심만 내다가 놀이가 끝이 난다.
놀이를 조금 더 진행시키려면 감자구이를 해야 하는데 감자는 알이 굵어서 익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놀이에 집중하는 사이에 동네 어른이라도 지나가시다가 딱 걸리면 불장난한다고 호통하신다. 그래서 감자구이까지는 전개가 안된다. 대신 감자는 아궁이 속 잔불이 있으니까 아쉽지만 보리이삭 구이놀이를 끝내고 만다.
한동안 보리추수 후 그 밭에서 우리의 놀이는 그렇게 전개되다가 어느새 밭이 깨끗하게 갈아엎어지고 또 어느새 보면 그곳에 콩이나 들깨가 자라고 있다. 콩이 자라는 해에는 가을 콩구이가 보리구이 못지않게 우리를 설레게 했다.
이전 스토리에도 몇 번 얘기했듯이 우리 동네 옆으로 철도가 지나가고 있어서 호남선이나 전라선은 모두 이 철도로 운행을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SRT나 KTX 고속기차를 제외한 나머지 기차는 모두 이곳으로 다닌다.
그렇다 보니 철도가 우리 놀이터쯤 되었고 철도 건널목으로 논농사를 지으러 어른들은 소달구지나 경운기를 몰고 논으로 나가셨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고 농사철에는 덩달아 우리도 농사일에 동원된다. 논으로 내가는 점심밥이나 새참을 이고 가는 어머니 옆에서 물주전자나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따라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었다. 이 철도 건널목을 건너서 말이다. 어떨 땐 학교 가는 길이 지루하다 싶으면 이 건널목을 건너서 들판에 나 있는 농로를 걸어서 지름길로 가기도 했다. 그만큼 어린 시절의 골목과 같은 역할을 이 철도가 차지했었다.
그런데 귀가 잘 들리는 우리에게는 이 철도가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보리밭주인 가족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의 고통이 되었다.
보리밭주인 할머니에게는 철도 건너서 시내로 나가는 먼 데 동네에 시집간 딸이 있었다. 그 딸은 귀에 장애가 없었고 농사를 크게 짓는 넉넉한 댁으로 시집을 갔다고 했다. 바쁜 농사철에는 딸네 집에 며칠씩 머물러 계시면서 외손주를 봐주시거나 집 안 살림을 도우셨다. 또 겨울철 농한기에는 딸이 할머니를 모셔다가 호사를 시켜드렸다. 할머니께서 댁으로 돌아오실 때는 딸이 짠 색깔 고운 스웨터를 입고 오셔서 자랑을 하시곤 했다.
그날도 딸에게 온갖 호사를 다 받으신 할머니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눈이 내렸던 농로가 봄이 다가오려는지 따뜻한 햇살에 질퍽하게 녹아서 흙이 털신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나 보다.
진흙길을 걷는 게 불편하니 자연스레 철도로 올라서서 걸으셨겠지. 동네 분들이 가끔 이런 이유로 철도로 걸어 다녔다. 내 오빠도 학교에서조차 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철길을 타고 국민학교 방향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나도 몇 번 봤었다.
딸 집에서 동네를 향해서 오는 길 방향으로 할머니가 철로를 걸으셨다. 기차가 달리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등 뒤쪽에서 달려오는 서울행 기차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이제 막 소녀가 된 금지옥엽 무남독녀 외딸도 그 길에서 잃었다.
딸을 잃은 이후 다시 얻은 딸은 젖을 떼자마자 대전으로 시집간 할머니의 작은 딸이 데려갔다. 말문이 트이고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 때까지 양육했다가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행히 나중에 얻은 딸은 청각에 장애가 없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딸이 그때부터 부모님의 손발이 되어드렸다.
이제 보리밭은 우리 추억과 함께 저장되고 지금은 아로니아와 꽃사과,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밭을 가꿀 여력이 없으니 대전 사는 딸이 어느 날 내려와서 이 밭에 나무를 잔뜩 심어놓고 갔다. 해마다 열매 수확철이 되면 들러서 아로니아 열매만 수확해 간다. 밭에 나무만 심어놓고 가꾸지 않으니 잡풀이 무성하다.
큰 아픔을 안고도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아서 태어난 동네를 떠나 외지로 갈 수 없었던 밭주인. 그분의 여생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는 이제야 보리밭을 엉망으로 만든 꾸러기짓을 사죄하는 마음이 든다. 철이 이제 드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