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러기 일당의 보리밭 만행을 고발한다
흙길 끝에서 불어온 바람에는 먼 들녘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마른 흙먼지와 풀 내음이 어우러지면, 그 바람은 사람 사는 기척까지 슬며시 끌어안은 채 보리밭으로 스며들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보리 이삭들은 서로를 비비듯 스치며 낮고 잔잔한 소리를 사르락사르락 빚어냈다. 보리밭을 돌아나가는 바람결에 이삭들이 한결같이 눕고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면, 그 너머로 하루가 더디게 익어갔다. 볕은 서서히 누그러지고, 들녘은 말없이 제빛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시골집 대문 앞 맞은편 밭에는 주로 보리와 콩이 자랐다. 초여름이 되면 보리는 누렇게 익어갔다. 몸을 숨길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게 숨바꼭질 놀이인지라, 식량으로 쓰려고 농사한 보리밭도 우리에게는 설레는 놀이터였다. 보리가 자라고 이삭이 익으면 고랑과 이랑의 구분이 사라질 만큼 밭 전체가 빽빽해졌다. 보릿대를 헤치고 숨어들면 넓은 밭 어느 구석에 있는지 겉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땅에 얼굴이 닿을 만큼 납작 엎드려 키득거리다 보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술래는 보리 이삭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정도를 잘 살펴야 했다. 키득거리는 웃음이 몸에 진동처럼 번지고 보릿대가 유난히 더 흔들리는 곳을 찾으면, 그 자리에 다음 술래가 엎드려 있었다. 놀이에 빠져 있느라 보리밭이 엉망이 되는 줄도 몰랐다. 이랑과 고랑의 경계가 흐릿한 밭에서 달음질하다 보면 보리 이삭이 이리저리 쓰러졌고, 장난꾸러기들의 웃음소리가 동네를 울렸다.
이쯤 되면 보리밭 근처에 살던 밭 주인이 나올 만했지만, 그 밭의 주인은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하신 청각장애인 부부였다. 보리밭이 망가지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근처를 지나가던 어른들의 호통 소리에 그제야 우리는 보리밭 숨바꼭질을 멈췄다. 보리밭에서 벌인 장난은 그날 저녁 각자 집에서 회초리나 꾸지람의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도 보리는 추수 때까지 묵묵히 버텨 주었다.
보리 추수가 끝나면 보리밭을 샅샅이 뒤지며 놀기도 했다. 우리의 목표는 야생풀 까마중이었다. 유난히 보리밭에는 까마중이 잘 자랐다. 까맣게 익은 앙증맞은 열매는 아린 맛과 달콤함을 함께 주었고, 늘 간식이 부족했던 우리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먹거리였다. 까마중을 찾아 한 고랑씩 따라가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누볐다. 어쩌다 종달새 둥지를 발견할 때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까마중보다 더 귀하게 여겨진 것은 꽈리였다. 동글동글한 모양과 고운 색을 지닌 꽈리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겉싸개를 두르고 있었다. 꽈리가 익었는지는 그 겉싸개의 색으로 알 수 있었다. 옅은 마른 잎빛이면 말랑한 연주황색 열매가 들어 있고, 초록빛이면 단단한 초록 열매가 들어 있었다. 꽈리는 까마중보다 크기가 커서 씹는 맛이 더 좋았다.
추수가 끝난 밭에서 보리 이삭을 줍는 것도 그 계절의 즐거움이었다. 밭 주인이 워낙 알뜰해 이미 이삭줍기를 마친 밭에서 흘린 이삭을 찾아야 했다. 보리 이삭에 불을 붙이는 일은 먹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하나의 놀이였다. 종이에 불을 붙이고 마른풀이나 보릿대를 얹어 불을 키웠다. 불이 안정적으로 타오르면 그 위에 보리 이삭을 올렸다. 불길이 일정하지 않아 이삭이 새까맣게 타거나 덜 익기 일쑤였지만, 우리는 그저 불을 지피는 일 자체를 즐겼다. 간혹 보리가 먹기 좋게 익었다 싶으면 오빠가 말했다.
“익었는지 볼게. 뜨거우니까 내가 먼저 먹어 본다.”
오빠는 호호 불며 이삭을 입에 넣었다. 그렇게 놀다 보면 입 주위는 새까매지고, 조바심만 내다 끝나기 일쑤였다. 감자를 굽는 놀이까지 이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어른들에게 들키면 불장난을 나무라셨기에 오래 이어가기는 어려웠다.
한동안 보리밭 놀이가 이어지다 보면 밭은 깨끗하게 갈아엎어졌다. 어느새 그 자리에는 콩이나 들깨가 자랐고, 콩이 자라는 해에는 콩을 구워 먹는 일이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어린 시절 우리의 놀이 장소로 큰 몫을 차지했던 곳에는 철길도 있었다. 농사철이면 우리도 일을 거들었는데, 논으로 나르는 점심밥이나 새참을 어머니와 함께 들고 가며 물 주전자나 막걸리 주전자를 따르는 것이 우리 몫이었다. 그때마다 철도 건널목을 건너야 했다. 등굣길이 지루할 때면 그 건널목을 지나 들판을 가로질러 가기도 했다.
우리에게 철도와 건널목은 익숙하고 친근한 곳이었지만, 보리밭 주인 가족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고통의 현장이었다. 청각장애가 있던 보리밭 주인에게는 마찬가지로 듣지 못하는 모친과 아들이 있었고, 그는 이 철길에서 두 사람을 모두 잃고 말았다.
모친에게는 철길 건너 먼 마을로 시집간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은 청각장애가 없었고, 제법 큰 농사를 짓는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농사일이 바쁜 철이면 모친이 딸의 집에 가서 며칠씩 머물며 외손자를 돌보거나 부엌일을 거들었다. 한가한 철이 되면 딸이 모친을 모셔가 며칠 호사를 시켜 드리곤 했다. 돌아오실 때면 딸이 손수 지은 고운 빛깔의 스웨터를 입고 와 자랑하시던 모습이 동네 사람들 눈에도 정겹게 비쳤다.
그날도 모친은 딸의 집에서 머물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눈이 내렸던 농로는 따뜻한 햇살에 녹아 질척해졌고, 털신에는 흙이 자꾸만 들러붙었다. 걷기가 불편했던 모친은 자연스레 철길 위로 올라섰다. 그 무렵에는 동네 사람 누구라도 그렇게 걷곤 했다.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어서, 학교에서는 철길로 다니지 말라고 늘 신신당부하곤 했다.
그러나 하필 그 순간, 모친은 우리 마을 쪽으로 달려오는 기차와 같은 선로 위를 걷고 있었다. 청각장애 탓에 등 뒤에서 달려오는 기차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고, 끝내 피할 수 없는 순간과 마주하고 말았다.
몇 해 뒤에는 보리밭 주인의 아들마저 그 선로에서 기차와 충돌해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잃은 뒤 늦게 얻은 딸은 다행히 청각장애가 없었다. 아이가 젖을 떼자 시내에 사는 친척이 데려가 길렀고, 말문이 트이고 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딸은 그때부터 부모의 손발이 되어 집안일을 거들며 살아갔다.
큰 아픔을 안고도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그들은 태어난 동네를 떠나 외지로 갈 수 없었다. 억울함을 간직한 채 철길을 바라보며 슬픔을 삭여야 했다. 철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늘 그 자리에 놓여 있었고, 그 위로 기차는 예전처럼 쉼 없이 지나갔다. 그때마다 멈춰 서서 바라보던 시선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크게 말하지 않아도 깊은 슬픔은 뭉뚱그려져 마음속 상흔으로 뿌리내렸다. 그 사이 세상은 한 걸음 물러나 있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리던 보리 이삭과, 말을 주고받듯 내던 보리밭 주인의 숨비소리를 닮은 휘익 꺼어꺽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는 들녘을 스치며 사라졌다가도, 바람이 불 때마다 다시 떠오르듯 오래도록 마음속에 잦아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