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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Jun 08. 2024

공동묘지구역 SPP(sweet potato plot)

고구마에 진심인 아버지와 자식들


아버지가 낳으신 우리 4남매가 태어나고 자란 그 동네, 지금도 그 터에서 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터는 그대로이고 초가집, 슬레이트지붕 벽돌집, 지금의 기와를 얹은 양옥집에 이르렀다.


그 지역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낮은 산이 있었고 지금도 산의 일부가 남아 있어 지역주민 일부는 화강암 채굴을 업으로 하고 있다. 이곳에서 채굴된 화강암이 청와대 영빈관 전면에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철분 함량이 적고 돌의 성질이 단단해서 원래의 빛깔을 그대로 유지하는 석질을 가진 고급석이라고 한다.

이런 고품질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석산 외에는 이렇다 할 토산물이 없다.

아주 오래전 이곳은 바닷물이 드나든 곳이어서 뱃길, 뱃나들이 등의 지명이 붙은 지역이 있다. 바닷물이 드나든 곳이라서 토질이 그다지 비옥하지 않다. 들판은 벼농사가 대부분이고 우리가 나고 자라던 동네 앞 옆이 모두 논으로 이루어진 평야였다. 논이 많고 밭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형.


동네 옆으로는 기찻길이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기차소리를 듣고 자랐다. 서울로 가는 기차, 남도로 향하는 기차들이 이 지역을 통과한다. 옆 동네에는 완행열차가 멈춰 섰던 역사도 있었다. 지금은 화물, 여객 모두 취급중지 되었다. 우리가 속한 행정구역은 호남 교통의 요지였으니 기차가 정말 많이 다녔다. 지금도 구 선로로 화물기차나 서울까지 세 시간쯤 걸리는 기차가 다닌다.

 

동네 인근에는 산이라고 불리기도 민망한 야산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은 공동묘지로 활용하는 국가의 소유지다. 사유지가 아닌 이곳이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밭 사이 사이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분묘때문에 공동묘지가 되었다. 어느 날 분묘를 모두 이장하라는 통지가 날아들더니 이곳에 고속 선로가 지나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구불구불한 기존 기찻길 외에 KTX, SRT 고속열차가 다니는 새로운 선로가 이곳과 동네 옆 들판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고속열차로 지역에서 용산역까지 짧게는 1시간 남짓이면 이동한다. 1일 생활권이 되었다. 편리해졌다. 그런데 이 고속선로가 내 추억의 장소를 한 가지 빼앗았다.




어릴 때 일찍 아버지를 잃은 내 아버지는 집 울 안의 텃밭 외에는 가진 밭이 없었다. 쌀은 논에서 나오니 밥은 굶지 않았다.  그런데 간식거리 할 만한 고구마, 감자, 옥수수, 콩 이런 것들이 밭에서 나와야 하는데 밭이 없으니 늘 간식에 허기졌다.

한창 자라는 4남매의 먹성은 또 얼마나 좋은지 여섯 식구가 한 달에 쌀 한 가마(80kg)를 먹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난 양이다. 하루 온종일 뛰어놀다 보면 하루 밥 세끼 먹어서는 어림도 없다. 놀다 보면 배가 고프고 그러면 검은 무쇠솥을 열어봐서 식은 밥이 있으면 그게 간식이 된다. 반찬이라고 마땅했겠나. 그냥 김치나  노란 단무지. 아직 따끈한 고구마라도 있으면 더 좋았고. 뽀빠이나 자야과자는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 시절이 그랬다.


어릴 적에는 주인 없는 땅만 있으면 밭을 일구느라 야단들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때부터 일궈놓은 밭이 그 공동묘지 구역 안에 세 군데 정도 있었다.

공동묘지 구역이라 오싹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곳의 빈 땅을 밭으로 일구어서 구황작물이나 채소를 심었다. 젊은 엄마와 아빠가 그 먼 곳까지 새벽으로 밤으로 다니면서 밭을 일구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노곤해 온다. 그렇게 출근하시기 전 이른 새벽에 일어나셔서 먼 곳 밭까지 다니시며 당신들의 몸을 녹아내셨다.


당시에는 부랑자들이 꽤 있었는데 엄마는 혼자서 이 외진 밭에서 일하시기가 무서웠는지 꼭 나를 데리고 다녔다. 젊은 30대 중반 엄마를 따라간 어린 내가 엄마 일에 뭔 도움이 될까 싶은데 어린 나를 의지삼아 일하신 것이었다.

실제로 엄마가 일하시는 옆에서 익은 산딸기가 있나 찾아보거나 땅강아지가 땅을 파고드는 것을 구경하던 나는 비렁뱅이 차림의 부랑자가 공동묘지 구역을 지나다니는 것을 자주 보았다. 밭을 일구기는 해야겠고 공동묘지 오지에 혼자 가시려니 마음이 서늘하여 어린 나라도 세워 두신 것이다. 엄마와 나의 협업이었다. 더 자란 나는 이제 엄마의 일을 함께 도와서 진정한 협업을 했다.


그렇게 가족의 협업으로 그곳에서 우리의 출출한 배를 채워준 것들은 단무지를 만드는 매끈한 닥꽝무(일본식 이름), 콩, 들깨, 참깨, 배추, 당근, 가을무, 감자, 고구마.

그중에 일등공신은 단연 고구마다.

고구마는 우리의 겨울철 간식으로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냥 놀고 싶은 우리의 오후를 차지하고 귀찮게도 했다.




고구마 수확철은 온 들판이 추수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다. 농사도 하셨지만 석공이신 아버지와 시내 공단여공으로 잠시 일하셨던 어머니의 수확철도 몹시 바쁘셨다. 두 분이 이른 새벽에 먼 밭으로 가셔서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시고 고구마를 캐 놓으신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국민학생 어린 언니가 지어놓은 밥을 드시고 출근하신다. 고구마는 땅 속에 있다 젖은 몸을 종일 햇볕을 받으며 말린다.


우리가 출동해야 할 때는 오후. 동생 막내는 너무 어리니까 집을 지키고 있었나. 집에 가져갈 것은 사람밖에 없는데 그냥 집 보고 있으라고 했나.(그 고구마 풍경 속에서는 막내 기억이 잘 안 난다).

하교하여 집에서 숙제하고 뒹굴뒹굴 놀다가 오빠가 오기를 기다린다. 전교학생회장 잘생긴 6학년 오빠(우리의 자랑이었지)가 집에 도착하면 책가방을 던져두고 대신 리어카(손수레)를 잡는다. 2학년 나부터 5학년 언니,  6학년에 이른 오빠까지 3인 1조가 되어 수레를 끌고 그 밭으로 향한다. 집에서 상당한 거리 2km쯤 되나.


가을볕이 너무 따갑게 덥다. 가는 길에 어리다고 나는 오빠의 수레에 얻어 타기도 했는데 언니는 항상 뒤에서 밀었다.

밭에 도착하면 고구마가 이랑에 죽 늘어져 있다. 한나절 가을볕에 마른 고구마는 고슬고슬하다. 우리는 이랑의 고구마를 바구니에 담아서 수레로 옮긴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고구마 줄기에 흙을 쓱 닦아서 오독오독 껍질째 깨물어 먹는다. 물고구마는 물이라도 많지. 이건 밤고구마라 뻑뻑하다.


한참 고구마를 담다 보면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간다. 거기가 어딘가. 공동묘지 아닌가. 그땐 귀신이 젤 무서웠으니 귀신 나오기 전에 빨리 집에 가야 한다. 놀지도 않고 장난도 안 하고 땀나도록 고구마를 날랐지만 아직도 이랑에 고구마가 남아있다. 손이 점점 빨라진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욕이 날아올 엄마의 잔소리가 떠올라서 마음이 초조해진다. 오빠의 신경질도 날아온다. 오빠만큼 일을 재빨리 못하니 늦어지는 게 내 탓이다.


어둑어둑 해져갈 때 간신히 고구마를 수레에 담고 이제는 좁은 길을 되돌아와야 한다. 수레바퀴가 오솔길 옆으로 빠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또 고구마가 수레에서 떨어지지 않게 수레를 끄는 난도 높은 기술을 펼쳐야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조심스럽게 가면서 공동묘지를 벗어나 큰길에 다다르면 이제부터는 안심이다. 어두워도 괜찮다. 동네 길이니까 무섭지 않다. 가다 보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실 아버지를 만날 수도 있다. 집에 가면 따끈한 밥이 준비되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리가 없지. 언니는 밥을 해야 하고 나는 청소를, 오빠는 못한 숙제를 해야 하고. 막내는 그동안 초저녁잠에 들어 있으려나.


그렇게 며칠에 걸쳐 집으로 고구마를 나른다. 고구마는 헛간에 있다가 얼음이 얼기 전에 방으로 옮긴다. 아버지는 나뭇가지의 굵기를 고르게 선별하여 그걸로 통가리를 만드신다. 통가리가 놓일 곳은 길이가 긴 방의 윗목 아궁이 불이 잘 들지 않는 서늘한 곳이다. 통가리를 기설기 엮어서 통풍이 잘 되게 한다. 바닥에 곰표 밀가루 포대를 뜯어 깔아놓으신다. 그리고 그 위에 통가리를 세운다. 퉁가리 안에 껍질이 벗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고구마를 쌓아 놓는다. 이제 끝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고구마를 쪄서 먹고 통가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생고구마를 꺼내 먹기도 한다. 아궁이에 넣어 구워 먹기도 한다. 겨우내 고구마를 밥 먹다시피 먹었다.

우리의 출출한 허기를 채워주는, 가족의 일부처럼 겨울이면 언제나 윗목에 놓여있던 통가리 속의 고구마.

그 고구마는 옛 집의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 밭도 고속철로를 받쳐주는 큰 기둥이 세워져 지금은 잡풀만 무성하다. 사실 거기가 어디쯤인지 찾지를 못하겠다.




이틀 전에 가보니 아버지 텃밭에 고구마 두 두렁이 한창 덩쿨을 뻗어가고 었다. 안타깝게도 텃밭의 고구마는 당도가 별로 높지 않고 모양이 울퉁불퉁 품질이 하급이다. 몇 년 동안 그렇다. 올해는 어쩌려나. 고구마 줄기 김치를 담글 요량으로 심었지만 고구마를 버릴 수는 없다. 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는 고구마를 또 겨울에 드실 거다.

"아버지 그거 버리고 해남고구마 드세요."

"농사지은걸 아깝게 왜 버리냐? 금방 썩응게  썩기 전에 후딱 이거부터 먹어야지."

맛 좋은 해남 고구마를 배송해 드려도 하급 고구마를 다 드시기 전에는 손을 안 대신다. 아까운걸 왜 버리냐고 하신다. 그래서 이제는 맛 좋은 해남 고구마를 쪄다가 드린다. 그러면 찐 고구마부터 드시니까.

세상 맛있고 드셔보지 못한 간식이 얼마나 많은데 맛없는 고구마를 드시나.

아버지가 드시는 건 혹시 고구마가 아니라 젊은 날의 추억인가?

해남에서 자란 베니하루카 꿀고구마에 추억이 어디 있겠나.

그렇다면 아버지 텃밭을 황토로 객토해야 하는 것일까. 아버지가 건강하게 사셔서 고구마도 오래 심으시면 그깟 객토가 문제일까.



* 통가리 - 쑥대나 싸리, 뜸 따위를 새끼로 엮어 땅에 둥글게 둘러치고 그 안에 감자 따위의 곡식을 채워 쌓은 더미


통가리
고구마 줄기


매실 / 방울토마토


상추잎과 달팽이. 상추밭은 달팽이 천국


감자 / 고추 /  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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