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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어 Dec 16. 2020

안전 이별

찌질함은 찌질함으로 

얼마 전  sns를 하다가

전 남자 친구가 우울증 약, 자해, 자살 시도 등을 빌미로 끝난 관계를 이어 붙이려는 수작에 넘어가지 말라는 당부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자기는 넘어갔으나 끝이 절대 좋지 않다고. 그리고 그 글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표했다. 

나는 내 의식 저 편에 묻어 놓은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나와 나의 친구 '똑똑이'는 한 커뮤니티에서 그를 만났다. 그 남자는 내 친구 똑똑이에게 구애를 했고, 똑똑이는 헤어진 이후에 뒷감당이 어렵다며 여러번 거절한 듯 했다. 그렇게 꾸준히 구애를 한 것이 3년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날엔가 똑똑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는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사랑에 박수를 보냈다. (지금 보면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을 알았어야 했지만.)

첫인상은 참 순박하다는 것이었다. 순정남. 그런 타입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응원했다. 

우직하고, 무던한 그를. 

나는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가 몇년이 흐른 후 내 친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자기 친척 모임에 데려가며 결혼을 밀어붙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외였다. 거기다가 당연히 여자인 내 친구가 모든 일을 그만 두고 그의 연고지로 생활 터전을 옮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 모두가 그 관계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내 친구는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커뮤니티 모임에서 나는 다시 그를 만났다. 

구애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그는 내 친구의 커리어를 완전히 무시했고, 남편에 맞춰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 끝났구나. 


어쩌면 그가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고 있던, 그의 가장 큰 지지자인 나는 그 날 완전히 지지를 철회했다. 완전히 망가진 관계였다. 그리고 나의, 우리의 예상대로 친구는 얼마 후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후 그에서  문자가 왔다. 

자기는 더 이상 그 애를 지켜줄 수 없으니 잘 부탁드린다는 메시지였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나는 친구에게 너의 전 남자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고, 그래서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문자 했다고 알렸다.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니 둘이 잘 안 맞을만했네요.
연락은 그만하시면 좋겠습니다. 서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요. 행복하세요. 


그런데 내 친구가 아연실색 놀라서 나를 쫒아왔다. 평소 자기 얘기를 잘하지 않는 친구였지만 그날은 소상히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는 당연히 자신과 결혼을 위해 똑똑이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겼다. 그래서 심지어 회사 번호로 전화를 해 나는 그의 애인이니 회의실에 들어가 있는 그를 바꿔달라고 하기 까지 했다고 한다. 프로페셔널한 나의 친구는 그 남자와의 결별을 선택했다. 


그때부터라고 했다. 







그는 집으로 전화를 했고, 회사로 전화를 했다. 회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대표 번호, 팀 번호 할 것 없이 전화를 해댔다고 한다. 

귀가하다 보니 집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어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를 배회한 적도 있다고 한다. 


친구는 강제로 끌려갔던 가족 행사에서 며느리로 취급을 당한 덕에 그 남자의 어머니의 번호가 있었다. 이제껏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친구인 나까지 괴롭히기 시작하자 장고 끝에 그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다고 했다. 


당신의 아들이 결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를 못살게 굴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무서워요. 


처음으로 자신의 일상을 침해받은 그 남자는 결국 집 앞에서 동네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그때쯤 해서 내 친구에게 새 남자 친구가 생겼다. 친구는 원래 사랑에 매몰되지 않았다. 티가 나지 않아서 결별 후에야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새로 생긴 남자 친구와는 행복이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듯했다. 좋았다. 친구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다시 문자를 받았을 때는 욕이 나왔다. 


새로 생긴 남자를 자기가 아는데, 아주 별로인 놈이라고.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냐. 



그는 마지막까지도 내 친구를 어리고 멍청한 여자애로 여겼다. 

네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자식아. 



나는 친구의 당부를 모르는 척하고 그와 설전을 이어갔다. 



너. 내 친구에게 연락 그만하라고. 



네가 힘든 것은 내 친구의 몫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이럴 것이 아니라 네가 병원에 가라. 


왜 네 친구가 피해자라고 단정 짓는지 모르겠다. 이미 병원에 다니고 있고 치료도 받고 있다. 사람들이 나에게 미친놈이라고 한다. 너 싫다고 다른 남자랑 바람난 여자를 왜 그리워하냐고. 나도 그만하고 싶다. 근데 그게 맘처럼 안된다. 


그의 눈물의 호소에 어쩌면 나도 마음이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기 친구를 시켜 

"그 남자가 몸이 많이 안 좋고, 사경을 해매면서 똑똑씨만을 찾는다고, 전화 한 통만 해달라고" 

연락을 한 뒤라는 것을 알기 전이었다면. 

내 친구가 무시 하자 다음날 태연하게 "어쩜 사람이 그러냐"고 삐져서 다시 연락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이었다면. 




당신이 내 친구를 바람난 여자로 몰던지, 피해망상으로 병원에 다니던지 내가 알바는 아니지만. 계속 이러면 경찰에 신고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물론이고 내 친구에게 한 번 만 더 연락한다면. 내 친구가 아니라 내가 직접 신고하겠다. 


사실 친구는 신고를 주저했다. 스토커는 일단 훈방 조치를 받는 것이 기본이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수많은 범죄는 '데이트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저 남자의 지질함을 믿었다. 다른 사람의 일상은 지옥으로 만들면서도 자기의 일상은 끔찍이 소중히 하는 저 찌질함. 


그리고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나에게 정말 '무례하다'는 이야기를 남기며 다시는 볼 일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느꼈다. 

정말로 이 남자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얼마 전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는 내 친구에게 슬쩍 물어봤다. 



-그 남자. 이제 연락 안 와? 

-아니? 그러고보니 네가 연락했다던 그 이후로 안 와. 



똑똑이는 힘들 때 곁을 지켜준 새 남자 친구와 곧 결혼할 예정이다. 

예비 신랑은 몇 시간을 쉬지 않고 운전해 항상 똑똑이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연락이 안됐던 어느 날은 뛰어 돌아가 그 남자에게 잡혀 있던 내 친구를 안전하게 구해내기도 했다. 

항상 사랑 앞에 쿨 했던 똑똑이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예비신부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 지질한 남자의 일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우리는 결혼식이 오기 전에 그 남자의 사진을 돌려보기로 했고 그의 결혼식에 혹시 등장한다면 경찰을 부르자고 입을 맞췄다. 


그 결혼식은 완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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