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 & 충돌 15 main_Slovenia

by 꼬드kim

아빠는 TV에서 방영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볼 때면 나와의 동행을 물어보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준비가 되면 함께 해보자고 말씀드렸다. 그 준비는 내 마음의 준비이다. 내 욕심껏 짠 스케줄이 친구들도 힘들다는데 연세 많으신 두 분을 모시고 욕심을 포기하면서 여행할 자신이 아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설픈 여행자인 나와의 첫 유럽 입문보다는 전문 가이드가 있는 패키지가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예약을 했다. 유럽여행을 다녀오신 아빠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패키지는 시간 내에 많은 곳을 보여주고 만족도를 올려야 하기에 체력적으로 쉽지 않으셨을 텐데 아빠는 가이드가 알려준 내용의 거의 다 소화해내고 오신 거다. 나는 역시 멋진 아빠라고 칭찬해드렸고, 동시에 나의 마음도 준비가 끝났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다녀오신 아빠는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CT나 MRI 정도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검사는 생각보다 위험했으며, 결과는 더 나쁘게 나왔다. 결국 나는 아빠에게 동행하자는 말을 끝내 못 하고 말았다. 삼각형 울타리 중 하나가 무너져 내려 두 울타리만으로 지탱해야 하는 삶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을 때 나는 다시 여행을 생각했다. 아직은 다 회복되지 않은 마음들과 엄마의 체력이 걱정되었지만, 내게는 그리움을 덜어낼 낯선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늘 여행을 충동적으로 하는 버릇이 있어 그런지, 마음을 먹고 여행지를 고르려고 하니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드라마에서 봤던 피란(Piran)이 생각났고, 나는 어느새 슬로베니아(Slovenia) 티켓을 예약하고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충동적이다.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슬로베니아 관련 책부터 검색해보지만 많지 않다. 우리나라 여행객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는 아직 아닌가 보다.

그러다가 마음에 딱 드는 책을 발견했다. 슬로베니아를 살았던 저자의 이야기는 여행 준비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나를 충분히 슬로베니아의 매력에 빠질 수 있게 만들었다.


소박한 도시, 류블랴나(Ljubljana)[2017]

류블랴나 도착. 김포공항보다도 더 작은 느낌의 공항이다. 입국심사도 없이 바로 공항 밖으로 나와졌다. 저녁이라서 그런지 호젓함이 조용한 유럽 시골 느낌을 준다. 버스는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고 해서 셔틀 밴(go opti)을 타고 애티커스 숙소를 갔다. 숙소 앞까지 데려다주는 셔틀은 엄마를 위한 여행지에서의 내 나름의 배려다. 혼자의 여행이었다면, 아마도 처음부터 고생인 버스를 탔을 텐데 말이다. 빠른 길로 이동하는 밴 안에서 내일 일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숙소다. 이를 어쩐다 싶었는데 직원이 도르래처럼 생긴 기구를 통해서 나의 짐을 위층으로 옮겨준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황이라 불편하지만 그들만의 현명한 방안일 테니 그들의 삶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내일 이른 출발을 위해 조금은 이른 조식을 부탁하고, 오지 않을 잠을 위해 일찍 누워본다. 다락방 같은 숙소가 엄마와 내게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는 밤이 된다.



슈코찬 동굴(Škocjan)

역시나 잠이 오지 않는다. 느린 여행을 다짐하고 왔지만 6시, 나는 어느덧 출발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 8시 10분 기차를 기다린다. 9시 50분 도착은 이른 시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동굴 투어는 11시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여행에서 더 많은 것을 보려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거나 운전이라는 것을 택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슈코찬 동굴은 유네스코 유산이라고 한다. 투어는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고 나는 조금 더 간단한 코스를 선택했다. 동굴 안은 사진 촬영이 불가하여 어마어마했던 장관은 눈으로만 담아본다. 사진으로 풍경을 기록할 수 없어, 시간이 지나면 어마어마했다는 기억 외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동굴 투어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부슬비는 어느새 제법 굵은 빗줄기로 바뀌고 있다. 산책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3시 10분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점점 지쳐가고 계셨다. 류블랴나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간단한 코스를 선택한 거였는데... 결국 시내 구경을 포기하고 내일 갈 곳인 포스토니아 동굴행 버스표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지쳐 계시는 엄마를 보니 도보여행은 무리였던 것 같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적어도 2박은 류블랴나에 머물렀어야 했는데 나의 욕심이 엄마의 컨디션에 무리를 준 것 같아 죄송했다. 최소한의 짐으로 이동하기 위해 숙소에 캐리어 보관을 요청했다. 돌아올 예정이었기에 다행히도 보관을 해주겠다고 한다. 다시, 작은 여행을 위해 백팩으로 짐을 꾸린다.



포스토니아 동굴(Postojna Cave) 그리고 프레드 야마 성(Predjama Castle)

시간 분배를 잘해보겠다고 아침 7시 40분 버스를 예약했는데, 비도 오고 티켓 오피스도 빨리 못 찾아 10시가 되어서야 포스토이나 동굴 투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비 오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여행객들이 많다.

꼬마열차 같은 느낌의 동굴 열차를 타고 동굴을 돌아보는 기분은 색다른 느낌이다.


장관이 엄청난 프레드 야마 성 투어는 엄마가 좋아하셔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신기하게도 한국어 설명도 있다. 나는 프레드 야마 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 한가함을 잠시나마 누려본다. 모든 컬러가 초록 초록한 느낌, 딱 꼬집어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이 초록 초록이 좋아 매번 유럽행 티켓을 구매하고 있다.



피란(Piran)

티켓 오피스에 부탁해서 택시를 불렀으나 피란(Piran)은 안 간단다. 피란까지 갈 수 있다는 기차역에 내려줬으나 피란을 가는 기차가 없어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데려다줬다. 우리나라 택시 같았으면 기차역에 내려주고 그냥 갔을 듯한데, 버스 정류장까지 다시 데려다주는 택시 기사님의 배려에 팍팍하지 않은 것 같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그들의 배려를 나는 배우고 있다.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식사라도 하면 좋으련만 음식이 잘 맞지 않는 엄마는 피란 가서 드시겠다고 하신다. 기다리는 것을 무척이나 잘 못하는 나는, 운전 연습을 많이 해서 렌트를 할 것을 그랬다고 버스를 기다리는 2시간 내내 전광판의 온도와 시간을 주시하며 후회했다.


구글 맵을 통해서 시뮬레이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란에 도착하니 점심 대신 이른 저녁을 먹어도 될 것 같은 시간이다. Pirat이라는 해산물 식당을 골랐다. 해산물은 맛없을 수 없다며.. 그러나 트러플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런가? 음식을 반 넘게 남겨버렸다. 또 촌스럽게 현지 음식에 적응을 못하고 있다.


숙소로 향하는 길, 알 수 없는 나무 향기에 취해 콧노래가 나온다.

숙소를 향해가는 길은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쓸쓸함과 고요함이 공존하는 듯하다. 끝자락에 서 있는 그는, 여행객일까? 주민일까?

오늘 하루도 기다림이 많았던 여행이라 그런지 아름답다는 피란의 야경도 포기하고 8시 반 잠시 누웠는데 눈을 뜨니 새벽 4시가 넘어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잠시 산책을 나갔는데 서울과는 너무 다르다. 깜깜? 컴컴?

사람 한 명 없는 게 어쩌면 당연한 길거리에서 난 엄마와 잠시 오늘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오늘부터는 느리게 여행해 보자며...

새벽 산책을 하고 들어와 아침을 만들어 먹느라 일출을 놓쳤다. 밥이 뭔지, 여행에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낭만이 하나도 없는 듯하다. 그래도 밥이라서 엄마가 어제 보다는 많이 드셨다는 점에 만족하기로 했다. 항상 선택 뒤에는 포기라는 것은 있게 마련인 거니까. 상대적으로 아침 시간에 여유가 있는 우리는 피란의 골목을 둘러보기로 했다. 낯선 여행자의 발거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피란의 고양이가 골목에서 아침을 즐기며 엄마를 반겨준다.

피란의 바닷물은 맑고 바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살짝 바닷물에 발을 담가본다. 차갑지만 기분 좋은 시원함이다. 유럽 여행에서 자주 볼 수 없는 바다라서 더 기분이 좋아진다.

도시를 좋아하는 내게 이곳은 상반된 매력으로 이곳에 머물러 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동화 속에 있는 듯 한 착각,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바다와 허름한 듯 하나 아기자기한 골목이 있는 곳.



블레드(Bled)

오전 10시 36분, 버스는 또 예정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버스가 꼭 정확한 시간에 움직여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의 부정확한 기다림은 불안감을 상승시킨다.

블레드(Bled)에 도착해서 식당 위치를 인포에 물어보니 걸어서 30분쯤 걸린단다. 아무래도 예약시간에 맞추려면 택시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할 것 같다. 특이하게 사람당 요금(무려 인당 5유로)을 받는 슬로베니아 택시를 타고 블레드 성에 도착하여 간신히 점심 예약시간에 맞췄다.

미리 메뉴판을 학습하고 온 나는 오늘은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며 도미가 얹어진 리조또와 이태리식 만두요리 라비올리를 주문했다. 역시 내게는 많은 식사량이었지만 과식을 해본다. 언제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늦은 점심 식사 후 블레드 성을 천천히 둘러본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공연, 그리고 아름다운 블레드 성은 나의 걸음을 자꾸 더디게 걷게 했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에 숙소를 찾아가느라 신통치 않은 방향 감각이 제대로 오작동 중이다. 30여분이 걸리는 숙소를 조금 더 헤맸더니 저녁의 한 중간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여권 원본을 챙겨 오지 않은 내게 호텔 직원은 체크인을 거부했다. 얼마나 이 직원과 입씨름을 해야 나를 받아줄 것인가를 생각하며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였다. 류블랴나에서 피란으로의 여행은 국내여행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짧은 생각 탓이다. 다른 장소를 알아오지 않은 이 늦은 밤, 나는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 이 심정으로 직원과의 실랑이에서 이겼다. 그런데 과연 이긴 것이 맞을까. 나는 승리 대신 야경을 포기했다. 이 아름다운 블레드 성의 야경을 말이다.


아침 식사 후 느긋하게 산책을 시작한다. 짐을 맡기고 블레드를 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어제 여권 원본이 없어서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수 없다고 협박당한 이후라 나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체크 아웃 후 물어보니 다행히 맡아준다고 한다.

플레티나 타고 블레드 성을 구경하기로 했다. 플레티나를 조정하는 할아버지의 손은 그분이 얼마나 이 생활을 했는지 표현해주고 있었다. 성한 마디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손의 마디들이 저렇게 될 때 느껴졌을 고통을 짐작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반에 얹어진 모든 이쁜 잔들을 보니 여행도 내팽개치고 쇼핑 모드를 하고 싶어 진다.

'넌 나를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어!'라고 찻잔들이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넋이 나간 채로 작품들을 보다 보니 예정된 시간보다 지연되었다. 1시 반 버스를 타야 했는데 시계를 보니 1시 반이고, 버스는 저어~~~기 있다. 늦었다! 버스기사님이 전속력으로 뛰고 있는 우리를 본 걸까? 3분 지각했는데도 운 좋게 버스를 타고 류블랴나에 돌아왔다.

애티커스 애나가 도와줘서 일단 빠른 체크인을 하고, 빵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했다. 엄마 체력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된 식사를 먹어야 하지만, 난 류블랴나가 더 궁금했다. 싱싱해 보이는 채소들을 봉투에 담아 챙겨본다. 오늘은 외식 대신 엄마가 좋아하는 밥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유난히 채소들이 이뻐 보이는 건 왜일까? 시장 투어는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인물 사진은 촬영 당시의 감정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첫 여행 이후 알았다. 엄마가 찍어 준 나의 모습이 신나 보이는 것은 아마도 사고 싶었던 채소들도 사고, 엄마의 컨디션도 나의 하드 한 유럽 여행 모드에 어느 정도 적응하신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나는 산책을 하다가 또 욕심이 나서 류블랴나 성 투어를 신청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엄마의 걸음이 늦어지고 있다. 그래 오늘도 딱 요기까지가 오늘 여행의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점점 더 슬로베니아가 좋아지고 있다.


류블랴나 아웃-바르샤바 인

아쉬운 마음이 많이 남는 류블랴나를 이른 오전부터 산책한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1위를 하고 있는 식당으로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으나 야외의 분위기에도 맛은 올라가지지 않았다. '역시 고기는 먹을 줄 아는 놈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나고 엄마와 나는 음식을 남겼다. 애나가 불러준 택시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바르샤바 숙소까지 이동할 계획을 세운다. '택시를 손으로 잡을 것인가, 택시 어플을 이용할 것인가.'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고요함과 외로움이 골목마다 공존하고 있을 듯 한 이곳 슬로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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