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by 꼬드kim

"시간 되면 잠깐 차 한잔 하자."

친구의 카톡 메시지이다.

대략의 시간만 정하면 장소를 말하지 않아도 쓰윽 나가게 되는 그런 사이.

친구는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책 두 권을 선물했다. 책 제목을 보자 코로나로 옴짝달싹을 못 하고 있던 내게 여름의 더위를 버텨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열심히 설득을 해도, 영상을 봐도 꿈쩍을 안 하는 나는 가끔 소설에 묘사된 몇 줄의 문장으로 내 로망을 만들곤 한다. 그중 하나가 언젠가 읽었던 하루키 소설 해변의 카프카 속의 소년의 서핑이다. 한 번도 관심이 없었던 서핑이 하루키 덕분에 서핑을 배워보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바뀔 줄이야. 그러나 간절함만으로는 실천되지 않는 것이기에 이 책을 받아 들고서야 로망이었던 서핑에 대한 간절함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물 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어둠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바닷속은 황홀함을 품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느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는 다합을 더 늦기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자유로운 영홍을 위한 시간들은 저자가 산티아고를 순례하는 여행기였고, 책 끝자락에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에 대해 적혀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아직은 읽지 않았던 순례자라는 소설이 내심 궁금했다.


그러고 얼마 후

"뭐해?"라는 언니의 카톡이다.

"쉬고 있는데 곧 친구 만나러 나갈 예정이야"라는 나의 답장에

"회사 안 가고?"

"응, 오늘 내 생일이라서 휴가 냈어."

"응? 오늘 생일? 아닌데..."

"회사 일 때문에 양력은 절대 못 쉬니 그냥 음력으로 해"


어릴 적은 엄마가 음력을 챙겨서 그렇게 했지만, 성장해서 음력으로 생일을 헤아린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일을 하다 보니 이 특정일에 쉬고 싶다고 양해를 구해봐도 승인을 안 해주는 팀장의 강경함에 정시 퇴근은커녕, 밤 12시까지 일을 해도 끝이 안 나다 보니 서러움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그날 이후 내 생일은 음력으로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퇴사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 저녁 친구와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어디야?"
"집 근처야."

"들어오려면 멀었어?"

"무슨 일인데?"

"집에 가고 있어. 어서 들어와."

서둘러 갔더니 아파트 정문에 언니와 조카가 서 있다. 조카 손에는 향기 나는 장미 한 다발이, 언니의 손에는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무뚝뚝한 이모의 생일을 챙겨주러 이 밤,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집으로 들어가니 먼저 도착한 동생과 조카가 있다. 이 순간이 멋쩍기도 했지만, 감동이 제대로 한방을 먹인듯한 기분이었다.

생일 축가를 부르고 나서 애교쟁이 조카의 장미 전달식이 있자, 유난히 낯 많이 가리는 남자 조카가 점퍼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낸다.

"고모 생신 축하드려요."

나도 덩달아 어색해진다. 초등학생이 건네는 생신이라는 단어에 내 나이는 백세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봉투에 무엇이 들었을까 내심 궁금해하면서 열었더니 문화상품권이 나온다.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책 안 좋아한다는 녀석이 이런 걸 샀을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했다. 낯가리는 조카의 선물을 동생이 대신 설명해주고 있다.

"선물 사는 것을 고민하길래, 고모는 책을 좋아하니 문화상품권을 선물로 하면 좋을 거라고 했어. 요한아, 아빠 말이 맞지? 고모가 엄청 좋아하지?"

쑥스러운 듯 어색한 웃음이 서로 간에 오고 간다. 그렇게 그날 밤은 감동이 진하게 새겨졌다.

무슨 책을 사야 더 의미 깊은 선물이 될까 고민하다가, 며칠 전 생각했던 순례자와 그전에 사려고 적어둔 리스트 중에 한 권을 골랐다. 조카가 선물로는 두 권을 산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이 선물을 받자마자 국어책에서 읽었던 한 단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탕을 사러 온 남매. 그들은 사탕 값에 턱없이 부족한 돈을 내놨으나, 어른이던 주인은 고민하다가 잔돈을 그 아이들에게 주었다. 돈이 남는다며.. 그 이야기는 한동안 내게 훈훈함으로 남아있었고, 이 선물을 받자마자 나도 이런 훈훈함으로 선물의 감동을 더해보고 싶었다. 일부러 번역본이 아닌 영어로 된 순례자를 주문했다. 단숨에 읽을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을 계속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영어 공부를 안 한지 오래되어서 책을 읽는 것인지 단어를 검색하기 위해 핸드폰을 보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급기야 종이책인데 나도 모르게 문장 중 단어 하나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복사하는 행동까지 보였다. 제대로 된 선물이 골라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 많은 단어와의 씨름 끝에 겨울이 되어서야 순례자를 다 읽었다. 그동안 책은 너무 늙어버렸다. ㅎ

저자의 생각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자신만의 검을 찾아 나선 주인공처럼 나도 조카 덕분에 신년인 지금 나만의 검을 찾아 나설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걸음인 나머지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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