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에게.
네가 비형이 아니라 에이형이란 점은 과히 충격적이다. 그런데 사실 나도 '비형 아니면 오형이죠?'라는 말을 자주 들어. 그렇지만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 아니 뭐 지인으로 갈 것도 없어.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사실은 낯만 안 가릴 뿐, 굉장히 쪼잔한 에이형이란 걸. 네 주변엔 유난히 에이형이 많다고 했지? 에이형들끼리 모여 살면 어떨 것 같니? 응.. 우리 집 얘기야.. 내 남편도 에이형, 아들도 에이형이야. 좋은 점이 있다면 상대방이 삐질까 봐 어휘를 순화시켜서 상처받지 않을 단어로 대체하는 노력을 하게 돼. 상대방에게 좋은 말 예쁜 말 많이 쓴다는 게 얼마나 좋니? 근데 단점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로감이 생긴다는 거지.. 막 지랄하고 싶어 지는 마음이 한 번씩 비집고 올라와. 아무리 꽉 뚜껑을 눌러도 삐져나오는 거지 그런 마음이. 아직은 애가 어리지만 아들까지 커서 삐져대면 우리 가족은 아마도 값비싸고 성능 좋은 삐진 마음 풀어주는 기계를 사 와야 할 거야.
넌 내가 아는 에이형 중에 가장 추진력이 좋아. 추진력이 좋은 사람은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네가 처음 책을 쓰고 있다고 했을 때, 사무실로 사용할 겸 카페를 차린다고 했을 때, 소설을 써보겠다고 했을 때. 이야~ 이도연 용기가 장난 없네! 싶더라. 그러고선 곧장 그걸 실행하는 널 보니, 뭐든 너와 함께 하면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거야. 지금도 봐! 내가 교환일기 쓰자고 하니까 네가 바로 매거진을 만들어 버렸잖아?! 이렇게 또 한 번 검증을 해버리니까 또 너와 어떤 작당모의를 꾸며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군.
그나저나 술 이야기를 이제야 한다는 게 말이 되니? 내 인생에서 가장 술을 멀리한 최근 일 년을 살았지. 사람들이 임신하면 술 못 마셔서 힘들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생각보다 별로 술 생각이 없더라? 뭐 본능적인 모성애..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사람들이 "한 잔 정도는 마셔도 된다던데~"라고 하면 난 항상 같은 답을 했어.
"한 잔만 마실 거면 뭐하러 마셔요? 먹은 거 같지도 않을 텐데.."
나는 술을 그런 식으로 대접하고 싶지 않다. 그건 무례지. 한 잔만 마신다고 해놓고 한 병을 먹으면 모를까, 정말 한 잔만 마시는 건 손만 잡고 자겠다고 해놓고 진짜로 손만 잡고 자는 거랑 뭐가 다르냐??! 그런 무례함이 어딨냐고!
아무튼 나는 그래서 임신 기간 동안 단 한차례도 술을 욕망한 적은 없었어. 그러다 시호를 낳고 나서 2020년 새해가 된 기념으로 나는 스스로에게 고주망태가 될 기회를 선물하기로 작정하고선 청하를 잔뜩 사 왔어. 원래는 파나마에 청하가 없었는데 최근에 중국 슈퍼에서 한국 물건들을 제법 많이 들여오더라고. 중국 슈퍼에서 청하를 본 순간, 난 이제 파나마에서 천년만년 살 수 있겠구나! 했지 뭐니. 한국 식당에서 감자탕을 포장해와서 거기에 청하를 혼자 네 병을 마시고 잤는데, 아.... 술도 액체라는 걸 깨달은 밤이었어. 새벽에 젖이 너무 돌아서 젖이 터질 듯이 빵빵해져 가지고 아파 죽겠는 거야. 국을 포함해서 액체류를 많이 마시면 젖이 많이 생기거든. 결국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일단 토를 한 바가지 한 후에 유축기를 찾아 젖을 짜서 버리고 잤단다. 거기서 끝나면 좋은데.. 다음날도 숙취에 시달리며 빌빌대느라 애를 못 보겠는 거야. 애를 안을 수가 있어야지.. 내 몸을 세우는 것도 겨우 하는데 말이야. 그래서 앞으로는 좀 바뀌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던 '적당히 마시기'를 시도해볼 때가 되었어. 엇? 아니면 지금 쓰면서 생각난 건데, '숙취 없는 비싼 술 마시기'는 어때?? 비싸니까 자주는 못 마시겠지만 대차게 마시고 싶은 날엔 다음날 숙취 예방을 위해 비싼 술을 마시는 거야! 헐, 오늘부터 동전 모으기라도 해야겠어!! 동전 한 닢, 두 닢씩 모아 술값에 보태야지. 부디 앞으로 다가올 비싼 술을 마실 그날, 술 취한 김에 지랄을 쏟아내지 않도록 그 점은 꼭 유의해야겠다.
아! 그나저나 혹시 '아무튼, 술'이라는 책 읽었니? 안 읽었다면 재밌으니까 꼭 읽어보렴. 나는 저자가 수능 백일주로 첫 술을 마신 에피소드에서 아주 자지러지게 웃었어. 너도 나와 같은 포인트에서 터진다면 괜히 신이 날 것 같다.
한국은 지금 딱 점심을 먹을 시간이겠네.
오늘 같이 술 얘기를 한참 한 날엔.. 인간적으로다가 다진 고추랑 다대기 팍팍 풀어서 순댓국 한 그릇 해줘라.
그럼 이만.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