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채리에게
네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어 글을 시작하자마자 알려두는데, 난 A 형이야. 하지만 남 눈치는 잘 안 보는 편이지. 혈액형 별 성격유형에 대해서 떠들길 좋아하는 나지만, 안 맞을 때가 많아. 나만해도 A형이라고만 정의 내리기엔 예상할 수 없는 복잡한 성질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신기한 건 내 주변에 A형 친구가 많다는 사실이야. 절친들이 A형이 많고, 남자 친구도 A형. 각자 다 조금씩 성향이 다르고 특징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A형들이 가지고 있는 배려심이나 깊은 속내를 선호하는 편인 거 같아. 가끔은 이런 예민함들이 피곤하기도 하지만.
50일째 에어컨 빵빵한 몰을 못 갔다니 정말 힘들겠다. 전기세도 많이 나오겠어. 한국은 봄인데도 아직 추워서 에어컨 얘길 하니까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체감이 되네. 난 아직까지도 전기장판을 틀고 자거든. 얼른 입국 제한이 풀려서 뜨거운 여름나라로 여행 가서 에어컨이 빵빵한 몰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싶네. 운동과 섹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운동하는 사람은 정말 섹시한 것 같아. 코로나 때문에 헬스장을 못 가서 한강에 걸으러 나갔거든, 한강에 뛰는 사람들 얼마나 섹시해 보이나 몰라. 나는 비염이라 뛰는 사람의 스치는 향기까진 맡을 수 없지만 다 잘생겨 보여! 다 예뻐 보이고! 게다가 네가 구경한다는 운동하는 사람들은 외국인들일 테니 영화의 한 장면 같겠네. 나는 한강에 마스크 쓰고 손뼉 치면서 걷는 아줌마처럼 입고 걷기를 하는데, 그 섹시함들에 자극을 받아서 나이키 바람막이를 하나 샀지 뭐야? 그런데 옷이 배송 온 순간부터 운동을 안 나가고 있어. 신박하지? 나는 너완 달리 사실 지독한 집순이거든. 귀찮음을 탑재하고 태어나서 평생을 귀찮음과 싸우면서 살았어. 잠 욕심도 많고 씻는 것도 싫어해. 그래서 운동을 꾸준히 나간다는 건 내가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야. 헬스나 요가, 걷기를 꾸준히 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귀찮음에 잡아먹힐까 봐서야. 너는 한국에 살 때도 아침 일찍 일어나고 매일 도서관을 가고 산책을 했었는데, 파나마에서도 역시 너의 루틴을 잃지 않은 걸 보면 부지런한 타입이구나 싶어. 역시 채리 너와 난 아주 다른 유형의 인간임이 틀림없지만 또 와야지 하는 다짐 다음날 공원을 못 간 걸 보면 끈기 없는 건 또 나와 비슷하군. 매일 꾸준히 땀 흘리는 섹시함은 다음 생에 해보는 걸로 하자. (ㅋㅋㅋ)
폴 킴 작업을 왜 1년 내내 하느냐면 말이지, 폴 킴은 굉장히 성실한 유형의 예술가 타입이거든. 앨범이 하나 끝나면 발표도 하기 전에 바로 또 다음 곡 작업을 하고 또 앨범 준비를 시작해. 작년에 이어서 일이 계속 주어짐에 감사하기도 하고 또 얼마쯤의 경외감이 생겨. 인기가 많고 유명하면 적당히 누리고 예능이나 행사를 뛰면서 돈을 벌어도 될 텐데 방송이나 유명세보다도 좋은 곡을 꾸준히 발표하고 자신의 음악 작업에 몰두하는 멘탈이 굉장하더라고. 예의도 엄청나게 바르고 말이야, 그러니까 폴 킴은 좋아해 보도록 해, 네 결혼식 축가 곡의 원작자이기도 하니까 (ㅋㅋㅋㅋㅋ)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면서도 그런 마음을 많이 가졌는데, 소설을 쓰면서 휴식으로 에세이를 쓰고, 쌓인 작품수가 어마무시하잖아. 어떤 유형의 예술가는 영감이 오길 기다리거나 충분한 휴식과 자극적인 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지만 성실한 예술가 타입들은 자신의 루틴을 잃지 않으면서 꾸준히 하는 거야. 나는 그런 성실한 예술가가 되고 싶어.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지 않으니 '성실'이라도 하자 싶어. 많이 쓰고 많이 발표해서 저 사람은 꾸준하다 라는 인상을 주고 싶고. 좋아하는 일에서만큼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나같은 신인에겐 많이 쓴다고 해서 많이 발표되어지는 건 아니라서 의기소침해질 때가 많지.
어제는 술을 마셨어. 저녁을 안 먹고 소맥을 들이부었더니 술병이 나서 하루 종일 잤다네. 그러고 보니 오늘의 편지는 대부분 꾸준함에 대한 이야기가 되네, 난 여전히 꾸준히 술을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는 중이야. 성실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숙취를 이겨내고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있어. 글이 제대로 써지려나 모르겠지만, 앉아있다 보면 똥이라도 쓰겠지. 파나마는 지금 아침이겠다. 오늘도 시호에게 이유식을 맛있게 먹이고, 커피를 내려서 좋은 하루를 시작하렴 :)
그럼 20000.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