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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Jul 19. 2020

옆집 남자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요 며칠 마음이 소란한 날들을 보냈구나. 그런 너를 위해 준비했어. 짜잔!



네가 좋아하는 일몰 사진이야. 이건 휴대폰 기본 카메라로 찍어 보정도 필터도 전혀 가미되지 않은 리얼 사진인데, 도시가 너무 빨개서 119를 부르고 싶을 지경이다.


노을이 유난히도 예뻤던 저녁이었어. 나는 한국에 있는 친언니와 페이스톡을 하며 퉁퉁부은 얼굴의 조카들 얼굴도 보고(한국이 전날 초복이었던 터라 저녁에 치킨을 잔뜩 먹고 자서 그렇대)... 그렇게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며 즐거운 통화 중이었는데, 창밖에 아름다운 핑크빛이 넓게 번져가더라고. 창을 열고 카메라를 뒤집어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한 언니와 조카에게 노을을 보여줬어. 그리고 핑크빛이던 하늘은 이내 온 도시를 붉게 물들이는데! 붉디붉은 노을의 품에 안겨있는 기분이 황홀하더라.  좀 더 본격적으로 노을을 바라보려고 테라스로 나가보았지. 테라스 건너로 보이는 옆집 남자창문을 열고 노을을 감상하고 있더라고.


  옆집 남자는 대형견을 두 마리쯤 키우는 것 같아. 내가 쓰레기 버리러 나갈 때면 큰 개 두 마리가 현관문 앞으로 달려와 짖는 소리가 나거든. 개가 짖을 때면 언제나 주인이 조용히 하라며 개에게 주의를 주는(?) 말소리가 이어져. ! 그리고 옆집 남자는 혹시 게이인가? 싶은 생각도 들어. 처음 이사 왔을 때 남자 둘이 그 집에 있었거든. 오빠는 그저 룸메이트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어째 느낌이 둘 사이가 애틋한 것 같거든. 아무튼 나는 옆집에 사는 사람이 꽤 마음에 들어. 그는 코로나 때문에 신발을 밖에 벗어두고 집으로 들어가. 몇 시간 뒤엔 그 신발들이 복도에서 없어지는 걸로 봐서 아마도 알코올을 뿌려둔 후 나중에 집 안으로 들이는 모양이야. 나는 그게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문화권에선 드문 경우라고 생각해. 이사 오기 전, 이전 집에 살 때에 인터넷 수리기사한테 코로나 때문에 그러는데 신발 벗고 들어와서 이 슬리퍼를 신어달라고 했더니, 자기는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불쾌한 내색을 하더라고. 그래서 이게 좀 무례한 요구였나 싶었거든. 그런데 요즘 우리 집에 배관 수리공이 두어 번 올 일이 있었는데, 요구도 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자기 신발을 밖에다 벗어두고 내가 건네는 알코올로 자기 몸과 수리 도구에 칙칙 뿌리고 들어오는데 나는 그게 어쩌면 옆집 남자가 집 밖에 운동화를 벗어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거든. 우리 집 현관 앞에도 내 슬리퍼를(주로 쓰레기 버리러 갈 때 신는) 벗어놨지만 옆집 남자 덕분에 적어도 수리공이 동양인들 유난 떤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 같아. 옆집은 불금이나 불토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소음도 없어. 금요일토요일 밤엔 음악을 크게 틀더라고. 근데 거슬릴 정도의 소음은 아니야. 음...  그리고 또.. 그는 꽤 규칙적으로 생활을 하고(아침 7시쯤이면 창문이 열리더라고), 주말엔 집을 구석구석 청소해.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운 날엔 한참을 창문 앞에 서서 감상에 빠질 줄도 아는 사람이지.


혹시 내가 옆집 남자 스토커 같니?(ㅋㅋㅋㅋㅋㅋ)

그저 조금 특이한 아파트 건물의 구조 때문에 블라인드를 걷어두면 우리 집 창문에서 그의 집 창문 너머의 풍경들이 보일 뿐이라는 점을 '굳이' 알려둘게.



 네가 당부를 하기도 했고.. 그래서 어제는 시호를 재워두고 테라스에서 새벽까지 와인을 마셨어. 안주는 치즈 몇 조각을 먹었는데 다행히 몸무게는 늘지 않았더라고. 조금 느린 듯하지만 그래도 꾸준한 운동과 간헐적 공복으로 3개월 만에 드디어 나도 앞자리가 바뀌었어. 물론 네 앞자리와는 다른 숫자야^^^^^

그나저나 입맛이 떨어진다는 건 도대체 어떤 느낌인 거니?? 나는 매일매일 '내일은 뭐 먹지? 오빠한테 뭐 해달라고 하지?' 생각뿐이다. 내일은 마파두부를 먹을 거야. 내일은 오랜만에 그동안 소홀했던 파나마 맛집 매거진에 연재를 해봐야겠다.


너의 오늘엔 마음의 소란이나 큰 감정 기복 없이 맛있는 음식들이 함께이길 바라.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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