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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Aug 11. 2020

그놈의 성취감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씩씩하게 기쁜 마음으로 이유식 공장을 돌리고 있어. 시호가 내가 만든 이유식을 잘 먹어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생각하면서 말이야. 블로그에도 가끔 이유식 일기 코너로 내가 먹이는 시호 이유식 식판 사진들을 올리곤 했으니 너도 봤겠지만, 나는 꽤 이유식에 공을 들이는 스타일이야. 근데 그게 뭔가 '사서 고생하는' 느낌이 드는 거야. 시호가 잘 안 먹어서 더 공들여 맛있게 해 줘야 겨우 먹는 아기라거나 그렇다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데, 시호는 사실 아무거나 줘도 잘 먹었거든. 근데 굳이 굳이 왜 그렇게 굳이! 내가 공들여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나... 생각해봤는데, 그게 요즘의 내 성취감인 것 같아. 일을 하지 않는 지금, 일에서 오는 성취감을 집에서 대체할 수 있는 건 나에겐 이유식이더라! 설거지, 청소, 빨래 이런 건 안 하면 더러운데 해봤자 티도 안나잖아(그래서인지 나는 이유식 만드는 시간은 즐거운데 다 만들고 주방 정리할 때 그렇게 피로가 몰려오더라..). 그런 면에서 이유식은 '육아와 집안일'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 묶여있다고 해도 결이 다르더라고. 예쁘게 정성껏 시호의 핑거푸드를 만들어 사진으로 남겨 기록해두니 괜히 하루하루의 보람이 느껴져! 게다가 내가 요리를 원래 하던 사람이니?? 시호 이유식에 열을 올리는 지금도 내 밥은 남편이 해주는데... 요리라고는 가스레인지로 해동 기능만 쓰던 내가 오븐까지 써가며 시호 이유식을 만들어내는 게 나에게 성취감을 주었던 것 같아. 그놈의 성취감이 나를 열정페이 이유식 공장장까지 승진을 시켰다고 할 수 있지. 사람에게 성취감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그걸 깨닫는다. 요새는 남편이 재료를 다져주는 등 이유식 만드는 일을 거들어줘서 수월해지기도 했고 시호가 작은 손으로 곧잘 집어 먹고 이도 없는데 잇몸으로 잘근잘근 잘도 씹어 먹는 걸 보면 참 귀엽단 말이지. 


그나저나 펜팔로 너에게 다채로운 파나마 라이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곳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통행금지를 시행하고 있는 터라 매일 육아 이야기뿐이구나. 이렇게 갇혀 지낸 게 3월부터인데 벌써 8월 중반이라니 언빌리버블이다 증말! 이러다 두 달여 후에 다가올 시호의 첫 생일도 집에서 셋이서 하는 건 아닌지.. 늦가을이나 겨울 즈음에 한국에 가고 싶었던 나의 바람은 코로나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 것 같아. 2020년을 통으로 날린 기분이다. 반복되는 갑갑한 격리 생활 중에 요즘의 소소한 낙은 너도 블로그에서 봤다시피 아파트 주민들과의 모임이야. 우리 아파트에 지인 부부가 두 가구 있거든. 우연보다는 의도적으로 같은 아파트에 이사를 왔어. 외출이 안되니까 아파트 내에서 집마다 돌아가며 반상회마냥 모여 한 달에 두세 번쯤 모임을 했는데, 첫 모임에 내가 드레스 코드를 제안했거든! 이유는 별 거 없어. 그냥 화장하고 외출복 입고 싶어서야. 아랫집으로 밥 한 끼 먹으러 가면서 너무 차려입고 가는 것도 우스워 보일 것 같고 그래서, 이럴 거면 다 같이 차려입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드레스 코드였는데, 지난번엔 여름 피서 콘셉트로 다들 수영복이나 계곡 차림새로 모여 앉아 백숙을 먹기도 했어. "다음 모임 드레스 코드는 뭐할까?" 고민하는 재미와 정해지고 나면 "뭘 입고 가지?" 고민하는 설렘이 무료한 일상에 잔잔하게 파도를 치는 요즘이야. 참고로 다음 모임은 '오피스 룩'을 입자고 하길래 공무원증을 걸고 가려고 찾아 두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에게도 잔잔한 설렘과 행복들이 곧 찾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지난 편지에선 유독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느껴지더구나. 아마도 비의 영향도 있을 거라 생각해! 아무리 비를 좋아한다지만 요즘 한국은 그야말로 '질리게' 비가 내리는 것 같더라. 비타민D를 좀 챙겨 먹어 보면 어때? 일 년 중 대다수의 날들이 흐리고 비가 내리는 유럽 어느 지역에서는 필수적으로 비타민D를 챙겨 먹는다고 하더라. 그렇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서래. 네가 좋아하는 요가도 다시 한다고 하니 곧 다시 너의 활기를 되찾을 거 같다. 그나저나 내년에 시골생활해라! 꼭 해라!! 한국 가면 시골집 놀러 갈래!! 나 시골 좋아!!!!!!!!! 


P.s. 남편이 요즘 너와 나의 편지가 텀이 길어지고 관심이 시들해진 것 같다고 해서 보란 듯이 잽싸게 답장 쓴다. 너도 시간 날 때 [빠른]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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