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연 Aug 15. 2020

보통의 행복이란

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채리에게


할루~ 채리 :)

 

오늘은 빗소리가 새 차서 새벽에 잠이 깨버렸어. 맑은 정신으로 너에게 나름대로 빠른 답장을 쓴다.

우리의 편지 텀이 길어진 건 아무래도 반복적이던 일상 탓인 것 같아. 소소하게 별의별 일이 다 있긴 하지만 매일 너에게 편지 쓸 때면 코로나 때문에 답답하고, 여행을 못 가서 우울하다. 일이 너무 많으니 피곤해 죽겠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내가 쓰는 글이 너무 매력적이지 않아서, 답장 쓰기가 망설여지더라고. (ㅎㅎ)

이번 주는 왠지 운동도 시작했고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 그런지 아침부터 새차게 쏟아지는 마지막 장맛비 소리를 들으며 너의 긴 편지를 읽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어.


채리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는 동안에도 늘 자신의 위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나를 위한 시간, 술을 포기하지 않는 네 모습도 새삼 기특하고 말이지. 시호를 위해 만드는 줄로만 알았던 열과 성이 들어간 이유식도 ‘나 자신’의 성취감을 위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마저도 멋있어 보여.

그리고 기혼 여성인 네가, 미혼여성인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 딱 좋아. 그래서 너와 대화할 때는 결혼 이야기를 듣는 것도,

육아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밌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보통의 기혼 여성들이 미혼여성을 대할 때의 온도가 딱 이 정도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과 속상함 정도를 토로하면서 ‘넌 애 낳지 마’, 혹은 ‘아이를 낳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같은 조언을 잊지 않아 가면서 말이야. 그 정도가 좋아.

“넌 틀렸어. 네가 월세 살고 있는 건 불쌍한 거야. 서른여섯은 노산이야. 얼른 애부터 낳아야 해. 결혼하면 남자 집에서 얼마 정도 해주나?” 같은 무례한 질문은 제발 이제 그만 받고 싶어. 너무 무례한 것 같아. 그게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요즘 내 또래의 기혼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나에게 강요하기 때문에 그들과의 대화가 나는 불편했나봐. 이 글을 보는 기혼 여성들이 ‘나는 그런 강요 안 한다!’라고 할 수 있으나, 나는 보통의 사람들을 주로 ‘친언니의 라이프’에 포커싱을 맞춰, 대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긴 해. 주말에 언니네 집에 잠시 들렀어. 가족들과 조촐 식사를 하고 왔지. 잔소리는 조촐하지 않게 들었고 말이야.

요즘 정부에서 아이파크나 푸르지오 같은 브랜드 아파트를 사들여서, 집이 없는 청년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임대를 준다는 거야. 신청일자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신청을 하라고 하더라고. 지난 편지에도 말했지만 나는 내년에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와 서울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시골집을 임대해서 살 생각을 하고 있고, 혹시 그 계획이 무산되더라도 지금의 이 감나무집이 너무 좋아서 더 살고 싶은 생각이거든. 여긴 월세도 엄청 저렴해! 그래서 가족들에게 말했지. 난 아파트보다 주택이 좋고, 아파트는 어쩐지 답답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청약이며 뭐며 해야 될 가치를 못 느끼겠다고 말이야.

좋은 아파트에서 안 살아봐서, 그 좋은 걸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청약은 되기만 하면 수천만 원을 앉아서 그냥 벌 수 있는데 왜 그걸 안 하겠다고 버티느냐 이거야. (몇 년을 적금한 청약통장이 있긴 해) 하지만 뉴스를 봐서 알겠지만 지금 한국에서 나 같은 싱글, 그리고 혹시 내가 신혼부부가 된다고 하더라도 청약 합산 점수가 너무 낮기 때문에 당첨될 확률은 희박하지. 만약에 당첨이 된다고 해도 수억 원의 빚을 지고, 수천만 원을 다시 벌어들이는 셈이 되니까(그것도 전세를 준다거나 했을 때) 나는 전혀 욕심이 나질 않는 거야. 내 삶의 가치에 어긋나는 기준이랄까. 난 적당히 내가 버는 정도의 수준에서 소비하며 살고 싶어.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욕심은 없어.


서른 중반을 넘어가면서 내가 보통의 사람들과 행복의 기준이 다르단  인정해야만 했어. 그것도 마음의 고통을 많이 많이 느끼면서, 겨우 찾아내고 알아차렸어. 나는 어떤 식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지를 나만의 행복 지도를 만들며, 나만의 나이와 시간을, 나만의 삶의 지표를 꾸려가고 있지.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자꾸만 평범한 게 옳은 것이고 행복한 것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듯 해.


나는 대한민국의 정서와 맞지 않는 사람인 걸까? 채리야...

파나마는 1년마다 계약 만기가 된다고 했지? 코로나 때문에 당장은 힘들겠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내가 노트북 하나만 들고 1년을 보낼 수 있는 시기가 온다면

파나마에서 1년 살이를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연세를 나에게 알려주렴 ㅋㅋ 파나마로 오래 머물러보겠다는 빅 피쳐를 이렇게 거창하게 구구절절 썼다.)


참 나는 이번 주부터 요가를 시작했어. 요가원을 다니는 건 꽤 오랜만인데 헬스에 비해 비싸지만 역시나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해. 마음이 너무 편안해지고, 밤에 술 먹는 것도 위안이 된다고! 하하..^^;;; 다음 편지엔 내가 얼마나 요가와 잘 맞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전해줄게! 비싼 요가매트를 샀거든!


긴 편지는 이만 줄일게 :)

오늘도 너를 위한 시간들을 충분히 보내길 바라며.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


매거진의 이전글 그놈의 성취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