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채리 Aug 18. 2020

찰나의 반짝임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네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강요받는 그 말들! 나 너무 알아! 아주 잘 알아!! 내가 불과 2년 전만 해도 너와 같은 처지 아니었겠니? 게다가 나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공무원 집단에 몸 담고 있었잖아. 회식할 때마다 결혼은 왜 안 하냐.. 애는 무조건 낳아야 한다... 심지어 애를 안 낳을 거면 결혼을 뭐하러 하냐면서.. 지겹게 들었다 정말~ 어휴.. 그때 생각하면 절레절레 고개가 절로 흔들린다... 왜 우리나라는 혼자 사는 여자와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를 설득시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잔뜩인 걸까. 게다가 나는 이런 경우도 봤는데, 어떤 부부가 굉장히 아기를 바라고 있는데 안 생기는 거야. 근데 주위에서 왜 아기를 안 낳느냐고 한 마디씩 거드는데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속상하더라고. 요즘 주위를 보면 아기가 잘 생기지 않는 부부도 너무나 많으니, 출산에 대한 얘기는 그냥 입 꾹 다물고 있는 게 여러모로 매너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그나저나 나는 어제 광복절 특집 '유퀴즈'를 와인을 마시면서 봤는데,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에 가슴이 아픈 밤이었어.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할 때 한국사 강의 들으면서 운 적이 많거든. 다 아는 내용이어도 또 봐도, 다시 들어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니... 유퀴즈를 보면서 '시호가 파나마에서 계속 산다면 파나마인으로 자랄 확률이 높겠지만(물론 한국의 국적도 가지고 있기는 해) 나는 꼭 국어와 한국사를 제대로 교육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21년 전의 우리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어. 아빠가 있는 과테말라로 떠나는 나에게 국사 교과서를 챙겨줬거든.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도 국사를 포기했는데.. 외국으로 떠나는 마당에 무슨 국사책을 챙겨주나, 생각했는데 우리 엄마도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지 모르겠어. 아무튼 유퀴즈를 보며 마음이 먹먹했는데, 놀면 뭐하니에서 싹쓰리까지 마지막이더라고! 정말이지 어제는 마음이 헛헛한 하루였다.


아니 근데, 뭐? 파나마 집의 연세를 알려달라고?? 우리 집이 있는데 어디 딴 데를 가려고~?

물론 우리 집은 숙박비가 무료이지만 약간의 노동을 요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둘게. 애를 좀 봐줘야 할 수도 있고, 집안일을 도와야 할 수도 있어. 내가 너를 콩쥐처럼 부려 먹어서 나랑 절교하고 돌아가는 일은 없도록 노력해볼게.(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 부디 연세 걱정 없이 파나마로 노트북 하나 챙겨 들고 훌쩍 떠나와주련. 물론 모든 기약은 코로나가 끝난 후겠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엔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네가 집 얘기를 하며 보통의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과 너의 기준이 다르다고 했잖아. 나도 그 말에 공감해(오늘 여러모로 공감 포인트가 많았네).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친구가 "그 동네는 입구부터가 다르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 곳에 살지 '못'하는 본인 스스로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부자동네에 대해서 열을 올리며 칭송하는데, 그녀에 대해 매력이 뚝 떨어지더라?! 그런 그녀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그 순간의 대화가 나에게 조금 괴로웠다고 해야 하나.. 피하고 싶은 대화였기에 나는 서둘러 주제를 바꿨어. 그런데 솔직히 내 취향의 집을 공감해주는 사람은 몇 없어..(ㅋㅋㅋㅋㅋㅋㅋ) 남편마저도 나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해. 내 취향은 나영석 PD한테 공감받곤 해. 나는 그가 만든 프로그램 중 '숲 속의 작은 집'이랑 요즘 하고 있는 '여름 방학'에 나오는 집들이 너무 좋거든. 진짜 저런 집에서 일 년만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면, 남편은 나더러 꼭 벌레 많이 나올 것 같은 집만 좋아한다고 하더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가구들의 취향은 하나같이 누가 쓰다가 버린 것 같은 걸 좋아한다나??!! 참나, 빈티지의 매력을 모르는 양반이라니까!



이번 편지의 마무리로, 오늘 테라스에 나갔다가 찍은 사진 한 장을 첨부할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찍은 사진이거든!


나는 하루 중 저녁 7시 15분 전(6시 45분이라고 하면 되는데 나는 꼭 우리 엄마처럼 말한다)을 가장 좋아해.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절기마다 변동이 있으니 절대적인 시간은 아니야. 요즘 파나마에선 그 시간 즈음이 가장 푸르거든. 해는 대부분의 몸을 숨겼고 도시는 밤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차들은 대부분 라이트를 켜지만 가끔 아직 켜지 않은 차들도 있어. 아마도 지금 움직이는 차들은 일을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혹은 안락함으로 품어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겠지. 어쩌면 설레는 누군가와의 저녁 약속을 위해 가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요즘같이 코로나로 인한 통행금지 시기엔 해당되지 않겠다. 이 시간의 도시는 깜깜한 밤처럼 반짝이진 않지만 이제 막 시작한 풋내 나는 반짝임들이 잔잔하게 일렁이기 시작해. 나는 이 시간의 풍경이 괜히 애틋해. 어쩌면 너무 금방 사라질 찰나의 은근한 반짝임이기에 그런가 봐. 정말 금세 도시는 어두워져 버리거든. 오늘은 이 풍경을 테라스에서 보고는 꼭 나의 '오늘'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매일매일 나의 오늘들은 잔잔하고 은근하게 빛나고 있었겠지. 오늘도 시호의 미소에 남편과 나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고, 시호가 오물오물 이유식을 집어 먹는 걸 보며 예쁘고 대견하다고 느껴지는 복합적인 감각들이 나를 힘나게 했어. 작년 봄에 독립 출판한 내 책을 책장에서 발견하고는 함께 여행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했어.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아주 잘 익은 깍두기가 있어서 참 맛있었고, 언제나 먹을 것 앞에서 나부터 챙겨주는 남편에게 고마웠어. 우리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지만, 우리 애틋하고 잔잔하게 반짝이는 것들 마음에 잘 주워 담자! 마음에 담긴 그것들을 원동력으로 삼아 또 다른 근사한 하루를 만들어내자!


P.s. 어제 생리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긍정적인 에너지로 답장을 쓸 수 있다니! 내가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뭔 소리야 ㅋㅋㅋ) 그럼,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매거진의 이전글 보통의 행복이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