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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Aug 27. 2020

월급보다 소중한 우리의 도가니를 위하여

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채리에게


편지를 다시 열심히 써보겠다는 다짐 불과 1주, 답장을 받자마자 편지 쓰기가 늦어졌네. ㅎㅎ 채리 집 테라스 뷰는 언제 어느 때고, 멋진 거 같다.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 푸른 사진은 새벽녘 어스름 같기도 한데 운치가 있어. 반짝임이 시작되는 시간이라는 글을 읽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파나마의 오후 7시 15분의 기분을 느끼러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어져.... 하지만 현실은 코로나와 태풍 덕에 더 암울해졌지 뭐야ㅠ 내가 지난 번 답장을 쓰고, 파나마 아파트의 연세를 물어봤는데 생각해보니까 비자때문에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없지 않아?


아, 내가 잠잠했던 일주일 동안은 말이야, 남자 친구의 무릎 수술이 갑자기 잡혀서, 병원을 왔다 갔다 했어. 어제 입원을 하고 오늘 수술을 했어.

남자 친구는 촬영 VJ인데 주로 예능프로에 촬영을 나가. ‘런닝맨, 범인은 바로 너,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유명한 프로를 많이 했대. 물론 나는 그 프로들을 절대 보지 않아. 남자 친구도 절대 내 글을 읽지 않지. (서로 취향 아님ㅋㅋㅋㅋ) 아무튼 ‘방송국 놈들’이 얼마나 지독한 놈들인지를 이번에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는데, 촬영 하나를 하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일은 다반사고 더운 날은 뙤양빛 아래에서, 비 오는 날은 얇은 천 원짜리 우비 하나에 몸을 겨우 가리곤 비를 쫄딱 맞으면서 일을 하는 거야. 연애 초반에 너무 힘들어 보여서 방송국 놈들 욕이나 실컷 하려고 ‘일이 너무 힘들겠다. 고되겠다.’ 했더니 ‘돈 벌고 좋지 뭐.’ 하더라고. 그런데 나를 만나더니 서서히 생각이 바뀌었대.


너도 알다시피 우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일이 일상인 사람들이잖아. 현재 지금 나는 불행한지, 행복한지, 기분이 괜찮은지를 수시로 체크하고 나아지려고 애쓰는 사람들. 기분 못지않게 건강도... 끔찍이 정도는 아니지만 적당히 챙기는 편이고 말이야. 나는 일이란 것도 나의 여가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여가를 하면 그때부터 밸런스 게임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해. 일은 안 하고 싶어도 먹고사는 일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지만, 여가 시간은 마음먹지 않으면 쉬이 내어지지 않거든. 이런 나의 가치관을 보고는  ‘나 자신을 아끼는 것’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어. 그래서 일을 당분간 쉬고 그동안 고장 났던 몸과 마음을 고치는 일에 매진하기로 했어. 최근엔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무게를 10킬로 가까이 감량했고, 오래 축척돼서 고질병처럼 지니고 있던 무릎 수술을 하게 된 거고 말이야.


앞으로는 돈이나 일 보다는 경험에 가치를 두고, ‘일이 곧 나’라는 생각도 접어두고, 나를 위해, 나의 여가를 위해 돈을 벌기로. 그러기 위해선 우선 건강한 몸과 마음을 먼저 챙기기로 한 거지. 다니엘 오빠가 너의 가구 취향을 보고 ‘남이 쓰다 버린 것을 좋아한다’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둘도 취향이 너무 심각하게 달라.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삶의 가치관이나 지향점이 잘 맞아서 같이 오래오래 지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배낭을 메고 가능한 많은 나라를, 가능하면 오랫동안 걸으며 여행하는 삶을 살고 싶은 나의 꿈에 그도 기꺼이 동참해주기로 했지. 아무튼 방금 의사가 다녀갔는데 수술도 잘 되었다고 하니, 재활 잘해서 산티아고를 걷는 날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아. :)


시호 이유식 만들기에 푹 빠졌다는 너의 글을 보고,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니 ‘오- 그럴 듯한데?’ 같은 느낌이었어. 영양 만점 건강식 느낌 보단 비주얼이 말이야, 그럴듯했어. 특히 미니 오니기리와 작은 계란 프라이는 너무 신기하고 귀여워서 먹어보고 싶더라고. (귀여운 거 좋아하는 편 ㅋㅋ) 시호는 오늘도 양손을 사용해서 엄마가 만들어준 귀여운 밥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고 있겠군. 오늘 서울은 태풍이 지나가고 있어 하루 종일 비와 바람이 불어. 게다가 한국은 지금 코로나가 다시 기승이야. 희망이 좀 보이나 했더니 다시 암흑인 요즘, 빨리 이 도심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하다. 파나마는 요즘 상황이 어떤지 궁금하네. 거기도 소식 전해 주길 바라며, 이만!



PS. (나는 좀 늦었지만 너는) 안 바쁠 때 답장 좀 (빨리 부탁한다)

연남동에서 도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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