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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Aug 29. 2020

남편이 없는 밤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맞네 맞아! 비자 때문에 너는 파나마에 최대 6개월까지 머무를 수 있어. 하지만 멀리 파나마까지 와서 파나마에만 있다가 갈 수는 없지 않겠니? 6개월이 되어갈 즈음 바로 양 옆에 붙어 있는 코스타리카나 콜롬비아를 여행해도 좋을 것이고, 아니면 나의 제2의 고향 과테말라를 다녀와도 좋을 거야! 다시 입국하면 또다시 6개월을 새로 카운트하니 1년까지 지내는 게 무리는 아니겠어.


남자 친구분이 너를 만난 후로 '나 자신을 아끼는 일'에 관심이 높아지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너에게 건강한 자극을 받으신 것 같구나! 무릎 수술도 잘 되셨다고 하니 코로나가 지나고 다가올 그 날엔 둘이서 씩씩하게 산티아고를 걷고 있겠구나.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힘든 여행은 남친(또는 남편)이랑은 하지 말자는 주의야. 나는 나를 잘 아는데... 몸이 피곤하면 예민해질 게 뻔해서 내가 그를 욕받이로 사용할 거 같거든.


파나마는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아. 이번 주부터는 외출시간제한이 풀렸어. 원래는 신분증 번호 마지막 숫자 시간에 2시간 동안 외출할 수 있었는데, 이제 아무 시간에나 제한 없이 외출할 수 있게 되었어. 저녁 7시~새벽 5시까지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지만.. 게다가 여자는 월, 수, 금에 남자는 화, 목, 토에만 외출이 가능한 것도 여전히 유지되는 까닭에 오빠와 나는 함께 외출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장을 보러 갈 수 있고, 시간제한이 없어서 필요에 따라 여러 마트를 다 들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환희가 느껴지더라. 10월엔 모든 제한이 풀릴 예정이라고 해. 여전히 코로나 확진자는 매일 몇 백 명씩 나오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모든 것을 올스탑 시켜둘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두 달 후 모든 제한이 다 풀릴 즈음이 되면 시호가 아장아장 걸을 것 같아. 시호는 벌써부터 뭔가를 잡고 걷거든. 소아과 의사 말로는 시호는 신체발달이 굉장히 빠른 편이래. 이대로라면 돌 전에 걸을 것 같은데 시호가 걸을 즈음엔 공원에 데리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야.


 오늘은 오빠에게 자유를 선물했어. 3월부터 시작된 긴 격리생활 동안 만나지 못한 오빠의 친구들이 한 집에 모여 술을 마시기로 했대. 저녁 7시 이후엔 통금이니까 모이는 순간 1박 2일 코스가 되는 건데 모임 중 유일한 유부남인 오빠에게 나는 흔쾌히 가서 놀라고 보내줬지. 사실 오빠가 오늘 친구 집 가서 노는 대신 어제는 내가 집 테라스에서 술을 퍼마셨어. 최근에 우리 집에 미니 화로를 하나 구비했거든. 점심에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 먹었는데 맛이 환상인 거야! 특히 나는 숯불구이를 좋아해서 격리생활 몇 개월 동안 배달시켜 먹은 유일한 외부음식이 숯불구이였어. 숯불에 구운 삼겹살 한 점을 먹자마자 오빠를 얼싸안았지 뭐니? 그래서 저녁에도 오빠가 숯을 피워 이번엔 꼬치를 구웠어. 돼지고기와 대파, 새우와 가지를 꼬치에 꽂았지. 얼마나 술이 술술 들어가는 맛이던지.. 둘이서 소주 6병을 비워냈지 뭐니? 당연히(?) 숙취가 심한 나는 오늘 종일 골골댔어. 늦잠에 낮잠까지 자고서야 괜찮아졌어.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오빠가 7시 전에 친구 집으로 간 바람에 오랜만에 내가 시호를 목욕시켰어. 시호가 혼자서 잘 앉지도 못할 때 씻겨보고 오랜만에 씻기는 건데, 얘가 이제 몸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니까 씻기는 게 너무 편하더라고. 욕조에 앉아서 물놀이하며 목욕을 즐기고 내가 가제 수건으로 입 안을 닦으려고 하면 싫어서 내 손을 막 밀어내더라고.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서 괜히 뭉클했잖아.(ㅋㅋㅋㅋㅋ주책 ㅋㅋㅋㅋ) 하루하루 시호가 크는 게 너무 아깝고 소중한 요즘이야. 그냥 보고만 있어도 예쁘고... 엄마가 되어 처음 느껴보는 사랑과 행복이 어마어마하게 크더라고. 마음 같아선 주변에 애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 행복을 꼭 느껴보라고 말하고 싶은데, 듣는 사람 마음이 속으로 무슨 생각할지 내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할 수가 없네....

엊그제는 오빠랑 부부싸움을 했어. 우리 집은 다 에이형이라 싸우면 서로 말을 안 하거든. 오빠는 나보다 마음이 풀리는 데 좀 더 시간이 걸리는 편이야. 말다툼을 하고서는 자기 일하는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리더라? 그러고는 안 나오고 계속 그 안에 있었는데, 나중에 화해하고 나서 하는 말이 방 안에서 몇 시간을 있는데 시호가 너무 보고 싶더래. 그런 양반이 오늘 첫 외박을 하니까 시호 보고 싶을까 봐 시호 동영상 찍어둔 걸 보내주었다. 이왕 놀러 간 거 육아 스트레스도 풀고, 역시 집이 최고구나.. 를 느끼는 밤이 되었으면 해.


사실 지금 조금 졸린 상태에서 답장을 써서 손가락이 움직이는대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다.

나는 이만 천사 같은 우리 시호 옆에 가서 누워야겠다.

다시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부디 어디서든 너의 안녕을 빈다. 아! 남친분께 쾌차를 기원한다는 메시지도 전달해주렴.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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