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zit - 7평 프로젝트 1. 벽지를 뜯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위해선 기존 질서의 어느 부분을 파괴하긴 해야 한다. 당연히 파열음과 괴로움은 덤이다. 그 과정에서 들여야 할 노력 역시 엄청나다. 그러나 성취, 변화, 성장 이것들이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파열음과 괴로움 단계에서 포기한다면 그 뒤에 것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올초 우리에게 7평 남짓의 작은 지하 창고(?)가 생겼다. 우리들의 성장과 꿈을 기대한다며- 작지만 의미 있게 쓰이길 바란다며- 선뜻 내어주신 공간이,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곳이 우리에게도 생겼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러 꿈들이 부풀어 가던 중 멤버들과 다 함께 이 공간에서 회의를 가진 것이 지난 2월.
처음 이곳을 방문한 우리는 공간에 대한 부푼 꿈들을 내려놓을 정도로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지금, 우리는 다시 꿈을 꾼다. 아마 다른 꿈들이 이뤄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 갈 또 다른 어떤 꿈들이 어떤 연결점들이 될지 모르기에,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과 혹은 미래에 이루고자 하는 꿈을 꾸며, 우리 존재 파이팅!
다른 프로젝트와 일정들로 바쁘던 틈에 다흥이 홀로(다흥, 외롭웠지ㅠㅜ) 벽지를 뜯으러 갔던 그곳에 말랑과 함께 굳은 다짐을 안고 재방문했다. 보자마자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만큼의 도전 의지도 생겼다.
첫 번째 미션- 방 안을 가득 채운 거대한 책상 분해하기! 작업을 하기 위해서 작은 공간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책상을 먼저 밖으로 빼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린 수없이 (미켈란젤로 다음으로) 오빠아아아!! 라며 멤버오빠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된.... 무턱대고 벽지 뜯기! 손으로 주악 주악 뜯다 보니 재작년에 벽화 프로그램 때 사용한 헤라가 있었다. 사실 이 도구를 이렇게 다시 사용하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가끔 우리가 해나가는 수많은 일들 중에 완벽히 이해하는 일이 몇 가지나 있을까 궁금하다. 우리들 일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 통틀어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나 될 수 있을지 정말이지 너무나 궁금하다.
인간이 삶이라는 거미줄을 짜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역시 한 오라기의 거미줄에 불과하다. 인간이 거미줄에게 가하는 모든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시애틀 추장
뜯다 뜯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어서 말랑의 지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무턱대고 뜯기 시작했는지 처절하게 깨달았고 친절한 그분은 선뜻 내일 도와줄게!!! OMG 그대여. 그대는 천사인가요. 세상엔 넘나 좋은 사람이 많은 것을 새삼 또 깨닫는다.
하지만 벽지 뜯기에 재미 들린 나를 말리는 말랑과 그분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도 또 한참을 더 뜯다가, 벽을 이쁘게(?) 뜯는 방법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네, 커터칼로 예쁘게 주욱 그은 후 주욱 뜯으면 돌돌돌 말 수 있게 예쁘게 뜯어진다고 합니다. 하하하) 내가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헤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대신 내일 사용할 물건들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마을 탐방!
처음에 왔을 땐 어두컴컴해서 이 곳의 매력을 잘 몰랐다. 낮의 영동대교는... 뭐랄까, 한국의 유럽 같은 운치가 있다고나 할까. 오래된 간판들, 가게 주인들이 직접 썼을 것만 같은 안내판들, 오래된 철물점. 우아. 아름다웠다. 이곳만의 분위기와 운치가 가득했고 삶이 있었고 알아갈 골목들과 거리에 나와있는 할머니들이 너무나 궁금했다. 아, 이런 재미에서 다들 마을 마을 하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인트와 철물점을 찾아 가던 길- 페인트 가게를 발견해 신나게 가던 그 길에서 우린 또 운명 같은 찰나를 만났다. 저녁을 먹으며 공간을 어떻게 꾸미면 좋을지 고민하던 우리에게-
신이 '옛다- 여기, 너네 꿈'하고 툭 던져버린 것만 같은 순간. 그 장면.
말랑과 둘이 이 장면에 반해버려서, 벽도 콘크리트로 하고, 물품을 담아둘 수납장은 화이트, 그리고 포인트 컬러는 PAL 색인 블루!!!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이러면서 엄청 웃었다. 맞장구 칠 순간이 너무나 많아서 행복했고 실제로 그런 공간이 될 것 같아서 즐거웠다. 남들이 우중충하다 그럴지도 모르겠다-했지만 뭐, 어때! 우리가 좋으면 돼지! 우리랑 비슷한 사람들도 많아! 라며 웃어넘겨버렸다.
그날 밤, 우리는 천근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헤어지며 말랑은 공간 스케치를 해보겠다 했고 나는 우리 회의록을 마저 써서 마감일을 알려야겠다 했다. 둘 다 피곤해서 지쳐 잘 줄 알았는데 우린 다음 날, 각자 할 일을 완수하고 이 공간에서 다시 만났다. (아, 이런 찹쌀떡 같은 친구 같으니라고.) 서로 신기해하며 이번 생에 함께 하게 된 것을 감히 영광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처음 이 공간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사실 기대 이하의 것이 주어져 실망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기존에 우리에겐 언제나 기대 이상의 것이 주어졌기에 기대가 컸던 것 같다. 그 기대는 점차 높아져 누군가의 선의도, 호의도 감사함보다 '당연함'으로 무장하고 있진 않았는지. 이 공간은 나에게 이 지점을 점검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기대를 일부러 낮출 필요는 없지만 아무것도 없이 왔던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함을 느낄 줄 아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저녁을 먹으며 말랑과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호의, 사람들의 관심 등.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억압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도 나누었다. 성장과정 속에서 겪는 두려움, 나이에 따른 조건들, 수많은 사회적 계약들 등.
벽지를 뜯으며 기분이 좋았다. 조금씩 뜯을 때마다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사실들을 거둬내는 것만 같았다. 사실 대부분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내 시선 속에 있던 불편한 어떤 것을 거둬내지 않았나 싶다.
최근 들어 나는 경험을 많이 할수록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과 분석이 빨라지는 것을 느껴왔다. 반복되는 것에 강한 자신감을 느끼고 사람들에게 쉽게 권유하곤 한다. '경험하세요', '나만의 스토리를 만드세요.' '여행을 많이 하세요.' 등등.
[경험] 정말 좋은 단어이다. 때론 '돈'처럼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 같은 어떤 것이다. 그런데 경험이란 것도 보면 이전에 경험한 틀 안에서, 내가 느낀 감정과 시선이라는 틀 안에서 재해석되고 분석된다. 어쨌거나 나의 기준, 나의 틀, 나의 편견 안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판단하지 않을 것.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이것이 필요로 하지 않나 싶다.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상태를 가지는 것. 무대포로 보이는 우리가 강한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말랑과 함께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판단하지 말 것. 느낄 것. 존중할 것. 새로운 것을 환영할 것. 모든 것을 나의 기대에 맞추지 말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기대할 것. 명확히 할 것. 이 모든 이야기 끝에서 필히 성취할 것.
희망을 가지길.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에, 우리들의 성장 가능성에.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강물이 더럽혀진 뒤에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이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크리족 인디언 예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