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참 길다

나의 감각을 깨우는 예술여행 이야기

by 체셔

[8월 9일 AM 10:30]

나는 아침밥을 먹고 말랑은 복숭아를 먹겠다했다. 그녀는 복숭아 껍질을 슉슉 깎더니 싱크에 버려두고 갔다. 나는 밥, 국, 버섯볶음, 김, 깻잎조림을 조금씩 해서 먹었다. 어젯밤에 그녀와 밥을 먹으며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는 스스로를 완전한 '배짱이과'라고 했다. 놀 수 있으면 무조건 놀고 할 일은 가능한 미뤄두는 성향이라고. 근데 너는 너-무 뭘 자꾸 한다고.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복숭아 껍질을 보며 그대로 둘까, 치울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부엌으로 와 차 한 잔을 하며 수다를 나누던 그녀와 이야기했다. 어제 커피포트에 낀 흰 곰팡이를 보지 못했느냐고(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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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PM 1:45]

반쯤 닫힌 문을 열고 나서 스티로폼 박스를 좀 미뤄두려고 툇마루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길에 문짝 위와 쿵! 하고 부딪혔다. 너무 세게 부딪혀서 마루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여행 오는 사람들이 한 번씩 다 박겠구나 싶었다. 방에 들어와 방마다 돌아다니는데 무의식 중에 허리를 굉장히 많이 숙이는 나를 발견했다. 눈가가 촉촉이 젖으며 말랑에게 말했다. "사람은 역시 호되게 배워야 고개를 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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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PM 2:50]

낮잠을 잤다.


[8월 9일 PM 5:00]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을 찾아 도로를 따라 걸어 나갔다. 비가 왔다. 추적추적. 우산을 들고 걷다가 비옷을 입었기에 그냥 비를 맞았다. 머리가 촉촉해졌다. 산책길은 찾지 못했다. 양갈래 길을 두어 번 왔다 갔다 하고 나서야 이 곳에 길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생이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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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PM 7:00]

카레를 만들던 말랑이 갑자기 나갔다. 나가서 들어오더니 손에 막 마당에서 뽑아온 파를 하나 들고 왔다. 난 충격에 빠졌다. 그랬더니 다시 나가서 애호박과 가지를 하나씩 들고 와- 근데 이제 막 땅에서 가져온 거라고 믿기엔 너무 색이 예쁘더라. 그래서 바로 썰어서 카레에 넣어버렸다. 진짜진짜진짜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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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PM 10:30]

봉화에서의 밤엔 항상 노트북과 촛불. 불빛에 날아드는 나방들에게 미안하지만 우린 일을 해야 해-라며. 서울에 두고 온(?) 이들을 위해서, 혹은 일상생활을 위해서 나에게 맡겨진 일들이 조금 남아있음에 감사하며. 봉화에선 우린 여전히 일을 한다. 이 여유 가득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말이다.


[8월 9일 PM 12:29]

아직도 일하는 중이야. 이제 자고 싶다. 말랑에게 이야기해야겠어.


오늘 아침에 우린 복숭아 껍질과 곰팡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말랑이 말했다.

하루 참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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