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루가 죽은 여름>, 왜 흥미로울까?

by 체스넛

* <히카루가 죽은 여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기준 1화)

** 퀴어물, 호러물에 대한 견해는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합니다.

'관객이 이 내용을 좋아할까?'

'이 부분이 지루하진 않을까?'

물론 오직 '내' 만족을 위해 창작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 경우도 유일한 관객이 '나'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내'가 보고 싶어하는 콘텐츠가 뭔지를 고민하죠.


그런 의미에서 <히카루가 죽은 여름>은 그 설계를 아주 영리하게 해낸 작품입니다. 타깃 관객층을 넘어, 저처럼 '퀴어물' 혹은 '호러물'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흡입력을 가졌으니까요. 저를 사로잡은 이 작품의 매력은 제목, 장르, 그리고 충격적인 1화, 이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제목

<히카루가 죽은 여름> 제목부터 강렬합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도 그렇지만, 구체적인 인물(히카루)과 시점(여름)을 명시했다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제목을 보자마자 제 머릿속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군요. '도대체 히카루가 누구길래? 왜 하필 여름에 죽었을까?' 이 작품은 제목만으로 이미 제 관심을 훔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장르

제목에 이끌려, 이 작품을 인터넷에 검색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 장르를 보고 의아했죠.

'퀴어(Queer)와 호러(Horror)?'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두 장르 모두 선호하지 않습니다. 제가 퀴어가 아니다 보니, 퀴어 장르의 감정선에 온전히 이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호러물은 보고 나면 불쾌한 잔상만 남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하지만 이 두 가지가 합쳐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문득 '롱블랙'에서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인터뷰가 떠올랐습니다.

“소설을 만들려면 두 가지 아이디어가 필요해요. 아이디어 하나하나는 이미 세상에 많이 나온 아이디어예요. 그러니까 두 가지를 버무려야만 독창성이 생기는 거죠.”
(출처: https://longblack.co/note/748#memoId=H1768098159001icr6qm2iqzc)


<히카루가 죽은 여름>의 모쿠모쿠 렌 작가는 '퀴어'와 '호러'라는 흔한 재료를 섞어 전혀 새로운 맛을 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장르 그 자체가 훅(Hook)이 된 셈이죠. 장르로 흥미를 끄는 작품은 오랜만이었습니다.


1화

이 작품은 시작부터 관객을 '혼돈'과 '안정'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줄타기하게 만듭니다.

시작은 기괴합니다. 빗소리, 실종, 그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기이한 연출들. 하지만 곧이어 화면은 눈이 시리게 화창한 여름날의 일상으로 전환됩니다. 주인공 요시키와 히카루가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평화로운 풍경에 긴장이 풀릴 때쯤, 요시키는 툭 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너 역시 히카루 아니지?"

순식간에 평화는 깨집니다. 눈앞의 존재는 알고보니 '히카루'의 가죽을 쓴 '무언가'입니다. 그 괴물은 요시키를 껴안으며 울먹입니다.

"학교 가고 아이스크림 먹는 게 처음이라 얼마나 즐거웠는데. 몸과 인격은 빌린 거지만, 네가 정말 좋아. 그러니 제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신의 정체가 들킨 괴물은 요시키를 죽일 수도 있는 공포스러운 상황. 하지만 작가는 요시키의 '공포'가 아닌 '슬픔'을 조명합니다.

히카루가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요시키의 독백을 통해 그에게 히카루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요시키는 눈앞의 현실을 받아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시키는 공포를 억누르고 괴물과의 공존을 선택합니다. '가짜 히카루'와 함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을 연기하죠.


저는 이 정신없는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물론, 단순히 초반에 관객을 정신없게 만든다고 몰입을 보장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반감을 살 확률이 높죠. 아직 세계관에 몰입하지 못한 관객을 흔들어 놓으면 관객은 그냥 그대로 튕겨 나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기괴함'과 '극단적인 분위기 변화'라는 원심력에 의해 튕겨나갈 것 같으면서도 (특히 '갑툭튀' 장면에서 작품을 하차할 뻔했지만) 이야기의 구심력으로 다시 빨려 들아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구심력은 뭘까요?


그 구심력의 정체는 바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의 얼굴과 기억을 그대로 가진 '다른 존재'가 나타나면, 나는 그 존재를 똑같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까?


앞서 제가 퀴어 주인공에 이입을 하기 어렵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요시키에게 완벽히 이입할 수 없었음에도,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궁금했습니다. 저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작품의 질문이 저한테도 큰 의미로 다가와요. 요시키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이 작품의 완결까지 보고 싶었습니다.


마치며

아직 완결되지 않은 이 이야기의 끝에서, 요시키는 과연 어떤 답을 내릴까요? 그리고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현실에서는 이런 서늘한 고민 없이, 소중한 사람과 온전한 오늘을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글을 마칩니다.


작가의 이전글<논나>, 감동을 어떻게 빌드업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