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 후반기가 다가오며 급격하게 떨어진 체력과 여러 통증으로 행동에 많은 제약이 생기자 내가 급 우울해졌었다. 운동이나 문화센터 특강, 자격증 수업을 신청하고 싶었으나 다 12~2월 진행되는 수업이어서, 차차가 빠르게 나온다면 1월 말쯤에 나올 텐데, 그럼 1/3이나 듣지 못하니 돈이 아까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남편이 급 일본여행을 제안했다. 얼마 전에 작게 모으던 적금이 만료되어 요즘 저렴한 엔화로 환전해 둔 돈이 있어서 겸사겸사 가기로 결정했다. 평소 내가 일본어를 할 수 있는 건 알고 있는 남편이었지만, 내가 얼마큼 잘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이 기회에 보여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인 후쿠오카는 비록 내가 5월에 갔다 왔지만 도쿄나 오사카보다 사람이 덜하고, 뚜벅이로 다니기 편하기도 하고 음식도 맛있어서 결정했다. 도착한 날은 후쿠오카 마라톤 대회 1주일 전이었다. 달리기 동호회에서 만나서 결혼한 커플이기도 하고, 최근 하프 마라톤 대회를 완주하고 달리기에 불붙은 남편은 생활스포츠 강국인 일본에서 새로운 운동화와 수영 물안경을 사기로 했다. 마침 후쿠오카에 큰 스포츠 전문 매장이 오픈해서 라멘을 먹고 숙소에 가방을 두고 쇼핑하러 달려갔다.
평소에 남편은 물욕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선물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달리기와 수영 용품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쇼핑에 눈먼 남편의 모습은 처음이어서 생소했다. 남편은 발 볼이 넓고 발목 내전이 살짝 있어서 쿠션감이 좋은 운동화를 골라야 하기에 다소 까다로웠는데, 그 때문에 내 일본어 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 발 볼이 넓은 와이드 사이즈가 있는 건 어떤 제품인지, 쿠션감이 좋은 건 어떤 모델인지, 다른 색은 없는지, 그리고 신었을 때 사이즈가 적당한 건지 등등 여러 가지 자세하게 점원과 이야기해서 운동화를 골랐고, 남편은 내게 ‘일본어 진짜 잘한다!’ 하며 함박 웃었다. 그다음으로는 도수가 있는 물안경을 고르러 가서 한국 안과에서 받아온 시력표를 기준으로 물안경 두 개를 골랐다. 조립식이어서 신기했다. 저렴한 환율 덕분에 직구보다도 훨씬 싸게 구매했다. 남편은 다시 운동 열정이 뿜뿜 한다며 그다음 날 새벽부터 일어나서 후쿠오카 달리기 성지 오호리 공원을 신나게 달리고 왔다.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남편이 최근에 회사 미혼 동료로부터 ‘결혼하니까 어때요? 결혼은 하는 게 좋아요?’ 하는 질문을 들었다는 말을 했다. 남편의 대답이 궁금해서 얼른 말해달라며 채근하자 남편은 ‘결혼하니까 좋아요. 그런데 사실 결혼하기 전이랑 크게 달라진 점은 크게 없어요.’라고 답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사실 우리는 250일 까지는 거의 매일 만났고, 결혼하기 약 10개월 전부터 같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 전부터 나는 차차를 임신 중이었다. 맞다. 우리는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식’만 올렸지, 달라진 게 없었다. 결혼식 준비 과정도 매우 순탄해서 남들이 왜 결혼 준비하며 싸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직 너무 초반이라 감히 말하는 게 우려스럽지만, 연애때와 결혼하고 나서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원래 보통이 제일 어려운 법인데, 이 정도면 나는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의 삶은 3개월 후 차차가 태어나면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결혼생활과 육아는 결이 다른 카테고리라고 생각한다. 그때도 이 대답이 남편 입에서 나오게 된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