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올 여성들에게>과 <암컷들>
엄마들은 항상 운다
엄마들이 만나면 금새 대화는 비슷해진다. “ㄱ은 요즘 잘 자요?” “ㄴ은 잘 먹나요?” “ㄷ은 아침은 먹나요” “ㄹ은 무얼 배워요?”
아이들이 성인 인간이 되기까지 완수해야 하는 퀘스트는 너무나 무궁무진하고 매번 돌뿌리에 걸리는 건 엄마다. 당연해보이는 걸 당연하게 하는 ‘인간’이 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윽고 엄마들 대화의 끝은 이렇게 자주 끝난다. “제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한시간 반 동안이나 잠자기를 거부하는 아이를 어떻게든 재우려고 어둠 속에서 버티고도, 소리지르는 아이를 그러안아 토닥거리고도, 엄마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땡볕의 여름 놀이터에서 벌건 얼굴로 두시간을 꼬박 놀아주고도, 매 끼니를 위해 장바구니에 손이 짓눌려 펴지지 않을 때도, 40도에 내리는 열을 내리려고 밤을 새워 미온수로 몸을 닦을 때에도, 엄마는 내가 부족해서 그래, 라고 말한다. 아빠들이 없는 시간에 홀로 버티다 소리를 지르고, 엄마 없이 못 자는 아이 때문에 어디든 떠나지 못하는 몸이 되어서, 자기는 끊임없이 바닥을 친다고 운다.
엄마는, 우리는, 사과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잘 해낸 것을 인정 받는 것은 드물었고 해내는 건 당연한 것으로 키워졌다. 타인의 시선은 스스로를 가혹하게 대하도록 만들었다. 엄마들은 쉬이 울도록 자라났다. 무엇이든 되어도 괜찮다고, 어떤 엄마여도 그것 일 뿐이라고, 지금 너가 버티는 시간은 그 자체로 훌륭하며 그 속에서 사랑을 느낄 꺼라고 듣지 못했다.
아빠들이 자신을 부족한 아빠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자신의 외모나 처지를 쉽게 긍정하듯 아빠 노릇도 잘 긍정한다. 그러나 엄마들은 늘어진 뱃살이나 출산 후 올라온 기미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말투와 감정을 끊임없이 검열한다. 그렇게 울며 고백한다. 자신은 한없이 모자라다고.
Hey, Girls
소년들이 수백년간 be ambitious 라고 가르침을 받는 동안에, 소녀들은 겨우 최근에 can do anything 을 얻었다. 그마저도 그걸 입고 두른 소녀들은 비난를 받기도 했다. 그 소년은 잘 웃는 아빠가 되고 소녀들은 잘 우는 엄마가 되었다.
야망이 있는 여자들은 늘상 아이를 포기한 여자들로 비난 받기 쉬웠다. 목표를 향해 가는 여자들은 인정 받지 못했을 뿐 더러 부정 당하기도 했다. 그것은 종종 현실에 없는 잠재적인 아이들을 볼모로 삼은 협박이 되기도 한다.
소녀들이 얻은 자유는 어쩌면 반쪽 짜리다. anything, 그것은 아직도 허용에 가깝다. 야망이 구체적으로 소유하도록, 비정형의 수단을 허가하는 방식으로 작동될때 do anything은 '해내봐, 착하게'에 그칠 때도 많았다. 무얼 해도 괜찮아,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아, 라는 것은 우리가 지독하게 무엇에 매여 있다는 걸 알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폭로가 될 수 있다.
지금에야 내가 얼마나 순종적이었는지 놀랄 따름이다. 하지만 뒤돌아 따져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진실은 그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보여주는 모델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교육을 아주 많이 받은 전문직 여성조차 남편을 따라 움직였다. 남편의 커리어가 우선이었다. 나는 순종적으로 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다. 돈 잘 버는 남편을 둔 여성은 아이를 보며 집에 있어야 한다는 관습은 비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존재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관습을 비웃는 것은 불가능했다. 샘과 나의 의사 결정 방식은 평범해 보였다. 나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방식이었다.
마이라 스트로버 <뒤에 올 여성들에게> 192쪽
무언가가 되고 싶은 여자들은 "존재하는지 깨닫지 못한 관습"들 속에서 자기만의 무기를 만들고 꺼내고 실험할 수 있는 기회들을 좀처럼 얻기 어려웠다. 벽 앞에 부서지는 자신을 추스려 올리는 데에 힘을 쏟느라, 싸우는 법을 쉬이 잃었다. 공정하게든 비열하게든, 싸움판에 올라도 되는지도 몰랐다. 수많은 딸들이 싸움판에 올라 분노하고 울고 버티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문장들이 덧붙여지는 중이다.
자연스럽게 야망하렴, 때로는 비열하게
"자연스럽게"라는 말을 순종적으로 따라가던 여자들이 멈춰, 다른 모델을 꿈꾼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야망을 가지고, 때로 사실을 숨기는 비열한 선택을 하고, 공모하고 연대함으로써 무언가를 만들거나 저지하거나 참여한다면, 끝내는 포기하지 않고 버틴다면, 그것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부를까.
그것도 아마 "자연스럽게"일 것이다.
다윈의 모성 본능은 우리 모두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것은 여성에게만 제한된 것도 아니고, 저 위대한 인물이 믿게 한 것처럼 즉각적이지도 않으며 모두가 아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요령을 배울 때는 깨어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아기 걸음처럼 나아간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동료 생물을 '다정함과 덜 이기적인 마음'으로 돌보는 기회를 준다.
게다가 다윈의 편협한 시각은 여태껏 '우리의 시야를 가려왔고' 그런 복잡한 형질이나 성적 이형이 모두 짝짓기 성공에만 관련되었다고 가정하는 과학적 편견을 조장했다. 분명 다른 형태의 사회적 경쟁과 관련된 사례가 많은데도 말이다. 이 토론으로 당분간 학계는 시끄러울 것 같다. 이처럼 놀라운 형질을 야기하는 힘에 어떤 이름표를 붙이든지 간에 암컷이 수컷만큼이나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점이 확실시되고 있다. 단지 쟁취하려는 몫이 다를 뿐이다. 수컷은 주로 암컷에게 접근하기 위해 겨루지만, 암컷은 생식능력과 육아와 관련된 자원을 두고 싸울 가능성이 더크다.
24시간 주먹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하여 영장류 암컷이 수컷보다 경쟁심이 부족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이들은 더 교활하고 더 치졸하게 싸운다.
루시 쿡 <암컷들>
암컷들은 수컷들보다 경쟁심이 부족하지 않다. 때로 더 교활하고 치졸하게 싸운다. 모성은 '다정함과 덜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여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자연스럽게'를 벗겨내고 마음 속에 각인된 관습을 지워내면, 우리는 또 어떤 모양이 될까.
소녀다운 야망으로, 여자다운 비열함으로, 이미 여성들 속에 있었던 진짜 야망과 비열함으로.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생의 열망이 나아갈 수 있게 한다면.
엄마들은 덜 울 수 있을까, 소녀들은 조금 더 시끄러울 수 있을까, 우리는 덜 헤맬 수 있을까.